지난 1월 22일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에 있는 콜리어 키(Collyer Quay) 건물의 공유오피스 회의실에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 대표들이 모였다. 서울 홍릉강소특구가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그랜드-K 창업학교 경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기업들이다.

이날 자리는 ‘한국판 모더나’를 꿈꾸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국내 스타트업에 해외 진출 전략을 제시하고 해외 투자가의 시선을 끌 방안을 현지 전문가들로부터 듣기 위해 마련됐다. ‘K-바이오 새싹’을 위한 일타 강사로는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는 벤처캐피탈과 컨설팅 회사가 나섰다.

싱가포르에서 법인을 설립하는 방법과 계좌 개설 같은 기본적인 내용부터 싱가포르를 교두보 삼아 동남아시아에 진출할 방법이나 현지 연구기관, 기업들과의 공동 연구, 협력을 위해 필요한 사항까지 다양한 내용이 교육 프로그램에 담겼다.

사이알바이오의 최고과학책임자(CSO)로 이 행사에 참여한 이상우 서울대 치의대 교수는 “대부분 현지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콘퍼런스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번 교육은 소규모로 진행돼 긴장감이 높아 좋았다”며 “투자자 미팅도 성사됐고, 싱가포르 병원과 협력해 치료제 관련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사이알바이오는 홍릉특구의 그랜드-K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회사로, 희소난치성 질환인 ‘쉐그렌 증후군’을 앓는 환자의 구강건조증을 치료할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바이오 헬스케어 기업의 성지 ‘한국의 보스턴 클러스터’를 꿈꾸는 홍릉특구가 이제 막 설립된 바이오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을 싱가포르에서 이처럼 밀착 지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홍릉강소특구의 주요 프로그램인 ‘그랜드-K(GRaND-K)’ 창업학교 경진대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인 벤처기업들이 지난달 22일 싱가포르에서 현지 교육 프로그램을 듣고 있다./송복규 기자

싱가포르는 최근 아시아태평양 지역 바이오 기업의 ‘거점’으로 점점 자리를 굳히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10년 전부터 기업에 대한 세금을 대폭 줄이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살리기 위한 예산을 편성했다.

기업에 유리한 세금 인센티브와 낮은 법인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인력은 교육 수준이 높고 정치가 안정된 점도 기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꼽힌다. 투명한 법률 시스템과 성숙한 금융 인프라, 물류 중심지라는 점도 스타트업에 우호적인 환경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지난 10년간 스타트업 생태계 육성에만 투입한 예산은 10조원이 넘는다.

싱가포르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 구축에 드라이브를 걸자 다양한 기업과 인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구는 605만명으로 서울보다 적고, 국가 면적도 서울과 비교하면 조금 넓은 수준에 불과한 도시 국가지만, 스타트업 5000개, 벤처투자사 500개, 액셀러레이터 220개, 유니콘 기업 31개가 모여 있다.

아스트라제네카와 다케다제약, 노바티스 같은 글로벌 제약사도 아시아 거점으로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했던 홍콩이 쇠락하면서 싱가포르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싱가포르에서 벤처캐피탈을 운영하는 원대로 빌트벤처빌더 대표는 “싱가포르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산업으로 육성하기로 한 뒤 예산과 인프라, 해외 인력을 유치하면서 단기간에 빠르게 발전시켰다”며 “글로벌 규제와 외환 투명성, 미래 예측성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원 대표는 “10년의 노력 끝에 동남아시아 벤처캐피털의 80%가 모였다”고 덧붙였다.

◇보스턴 클러스터의 꿈 함께 이룰 파트너로 주목받는 싱가포르

그래픽=손민균

신생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추진하면서 싱가포르를 중요한 파트너로 보고 있는 이유다.

정부는 최근 미국 보스턴 클러스터를 중요한 벤치마킹 대상으로 보고 있다. 미국 보스턴에는 1000개가 넘는 바이오·제약기업, 하버드대·매사추세츠공대(MIT) 등 280개 명문 대학·연구소·병원 등이 모여 있는 바이오 클러스터가 있다. 실리콘밸리, 샌디에이고와 더불어 세계 바이오 산업의 ‘톱3′ 클러스터로 불린다. 보스턴이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바이오 클러스터로 발돋움한 건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의 유기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바이오 산업의 핵심적인 플레이어들이 한데 모여서 공동 연구와 인력 교류를 자유롭게 했기에 빠르게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열린 제5차 수출전략회의에서 이런 보스턴 클러스터를 주요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고 첨단산업 클러스터(밀집지역) 육성 방안을 발표했다. 방안은 국내에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어 세제 혜택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작년 4월 미국 국빈 방문 때 보스턴 클러스터를 직접 방문해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을 직접 둘러봤다.

국내에도 충북 오송과 대구, 원주에 바이오 헬스케어를 표방하는 클러스터가 조성돼 있다. 이 가운데 홍릉강소특구는 대학과 기업, 연구기관, 병원이 한데 모여 있는 ‘물리적으로는’ 보스턴에 가장 가까운 모델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 고등과학원, 한국국방연구원 같은 연구기관과 고려대, 경희대, 서울과학기술대, 시립대, 한국외대 같은 교육기관, 고려대의료원, 경희의료원, 한국원자력의학원 등 대학병원이 반경 2.5㎞ 안에 모여 있다. 바로 한강 너머 벤처캐피탈과 서울아산병원과도 협력하고 있다.

특히 대학 병원은 홍릉특구의 가장 큰 강점이다. 한국 내 바이오클러스터는 2023년 기준으로 전국 15개 시도에 25곳으로 퍼져있다. 이 가운데 임상에 필요한 1000병상 이상 대규모 병원이 있는 지역은 서울과 경기, 인천 송도, 대전 정도다. 그마저도 대형 제약사와 바이오 기업이 수도권에 모여 있다. 홍릉 특구 내 박사급 인력은 7000명에 이른다. 서울바이오허브와 홍릉바이오헬스센터, 첨단의료기기개발센터처럼 기업들이 입주할 공간 덕분에 493개 기업이 홍릉특구에 입주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 홍릉특구가 개방적이면서 기업하기 좋은 클러스터 환경을 만들고 기업의 글로벌화에 필요한 노하우와 파트너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싱가포르는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 해외 진출의 교두보이자 가장 가까운 시험 무대라는 평가다.

그래픽=정서희

바이오 헬스케어 생태계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싱가포르도 한국과 협력에 적극적이다. 싱가포르 과학기술연구청인 에이스타(A*STAR) 산하에 있는 헬스텍(HealthTEC)은 헬스케어 업계와 학계, 의료계의 협력을 이끄는 컨소시엄이다. 홍릉특구는 지난해 2월 헬스텍과 업무협약을 맺고 동남아시아 지역 허브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홍릉특구 기업들은 헬스텍 컨소시엄에 참여해 싱가포르의 바이오 헬스케어 생태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고든 시옹(Gordon Xiong) 헬스텍 이사는 “홍릉특구와 싱가포르의 협력은 성공적인 사례”라며 “서로 교류를 강화하면서 홍릉특구의 스타트업들이 헬스텍에 가입하거나 가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옹 이사는 “홍릉특구 기업을 지원하면서 싱가포르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앞선 기술을 누릴 수 있고, 한국 기업은 싱가포르를 해외 진출 거점으로 사용할 기회를 얻고 있다”고 덧붙였다.

◇동남아 진출 교두보 추진하는 홍릉특구

그래픽=정서희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 바이오 기업 관계자들은 이미 시너지 효과를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망막 혈관 사진을 촬영해 심혈관·신장 질환을 예측하는 인공지능(AI) 의료기기 ‘닥터눈’을 개발하는 메디웨일은 싱가포르에 R&D 조직을 두고 임상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임형택 메디웨일 최고의학책임자(CMO)는 싱가포르는 뛰어난 안과 분야 연구자들이 많고, 다양한 추적 관찰 자료를 확보할 수 있어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헬스텍 컨소시엄에 가입한 덕분이다.

임 CMO는 “홍릉특구를 통해 헬스텍 컨소시엄에 가입했는데, 헬스텍은 유명한 연구자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는 게 큰 장점”이라며 “헬스텍 콘퍼런스에서 미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고, 발표와 홍보 기회를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싱가포르는 안과 분야가 강한 만큼 싱가포르에 진출해 좋은 논문을 많이 쓸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에서 의료기기 허가를 받을 경우 동남아시아 진출이 쉬운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임 CMO는 “의료기기는 결국 의사나 의료기관이 사용해줘야 성공하는 사업인데 장점 중 하나는 싱가포르에서 인허가를 받으면 동남아 지역은 대부분 쉽게 인허가가 가능하다”며 “사업화 과정에서 인도나 말레이시아 진출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에 싱가포르 진출로 이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임형택 메디웨일 최고의학책임자(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싱가포르 연구자들./메디웨일

세계 상위권 대학으로 평가받는 싱가포르 대학들과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싱가포르국립대(NUS)의 건강혁신기술연구소(iHealthtech)는 홍릉특구와 업무협약을 맺고 중개연구와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생명공학과 의학, 전기공학, 재료과학 등 18명의 교수로 구성된 건강혁신기술연구소는 첨단 헬스케어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화를 목표로 한다. 공학기술과 임상시험 강국인 한국이 테스트베드 역할을 할 수 있다.

알리 바가트(Ali Bhagat) NUS 건강혁신기술연구소 부소장은 한국과 싱가포르의 의료 발전 양상이 비슷하다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바가트 부소장은 “홍릉특구와 협력하기 위해 KIST와 고려대, 경희대 연구진들과 공동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했다”며 “한국과 싱가포르는 의료산업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바가트 부소장은 “한국과 싱가포르 사회는 고령화에 직면해 있고, 다루고 있는 문제가 비슷해 노인 요양 보호와 정신건강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있다”며 “싱가포르와 한국에서 개발되는 새로운 기술들이 상대방 나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