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면서 과학계가 우려하던 일들이 하나둘 현실화되고 있다. 국가전략기술이자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지원을 언급한 양자기술과 확대하겠다던 국제협력 분야 예산까지 삭감되면서 어렵게 구축한 해외 파트너와 신뢰가 위협을 받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5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지난 3일 양자 국제공동연구센터와 양자 기술협력센터 사업 책임자들과 회의를 갖고 올해 예산을 최대 25% 삭감한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이날 회의에 참여한 한 연구자는 “회의에서 사업의 추진 현황과 애로사항 청취도 이뤄졌으나, 핵심은 올해 사업 예산을 삭감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자리였다”며 “예산 삭감이 해외 공동 연구자들에게 신뢰도를 크게 떨어지게 만들 것이라는 현장 연구자들의 반발이 컸다”고 말했다.
양자 국제공동연구센터와 양자 기술협력센터는 국내 양자 기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선도국과의 국제 협력을 지원하는 ‘양자기술 국제협력 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양자 국제공동연구센터에서는 시급하게 확보해야 하는 10개 가량의 핵심 기술을 선정하고 국내 연구진을 해외로 직접 파견해 공동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양자 기술 수준이 높은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연구 현장의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는 전략이다.
정부는 애초 국내 양자 기술을 선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실제로 올해 R&D 예산을 삭감하면서도 12대 국가전략기술, 국제협력 관련 지원은 늘리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양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줄곧 관심을 보인 분야였고 선도국과 공동 연구를 포함한 국제 협력 역시 강조하던 방식이다.
그러나 양자 기술과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순항할 것 같던 사업은 출범 1년 만에 예산 삭감의 유탄을 맞았다.
이날 공개된 정부 계획에 따르면 기존에 선정된 양자 국제공동연구센터 10곳의 올해 예산은 당초 15억8300만원에서 약 25% 삭감한 11억7400만원이 배정됐다. 올해 신규 센터 1곳을 만들기 위해 새롭게 배정한 예산 2억원을 고려해도 전체 사업 예산의 삭감폭은 13%수준이다.
연구자들이 실제로 느끼는 예산 삭감률은 더 크다. 또 다른 연구자는 “회계연도를 맞추기 위해 사업 기간을 기존보다 2개월 줄이면서 기존 연구비에서 그만큼의 연구비를 삭감했기 때문”이라며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올해 사업 예산을 계산해보니 실질적인 삭감률은 37%에 달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예산을 해외 연구진들과 공동 연구를 위해 사용할 계획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연구진 대부분은 해외 주요 연구기관과 협약을 맺고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예산이 삭감되면서 해외 연구자들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한 예산을 충당하기 어려워졌다는 과학계의 우려가 나온다.
이 연구자는 “협약을 맺을 때 맞춰놨던 연구비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며 “이제 막 협력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협력 파트너들과 신뢰 관계가 흔들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연구진은 국내에서 사용할 연구비를 해외 연구자들에게 지원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 오랜 기간 파트너로 함께 연구를 이어가야 하는 해외 연구진들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시 방편인 셈이다.
사업에 참여하는 한 연구자는 “현지에 파견한 인원들과 즉시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를 했다”며 “또 다른 연구 과제를 수주한다고 가정하고 연구비 배분을 다시 검토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양자 기술협력센터사업도 기존 미주센터와 유럽센터 예산을 15억8300만원에서 13억3400만원으로 약 15% 삭감한다. 다만 ‘아시아거점 겸 총괄센터’ 신설에 2억5000만원을 지원해 예산 총액은 다소 늘릴 계획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정부 R&D 예산 삭감으로 사업 예산이 줄었을 뿐 내년 이후 원활한 국제 협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올해 일시적인 예산 삭감이 국제 신뢰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내년도 예산에서 올해 삭감 예산을 충당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양자 국제공동연구센터도 2곳 이상 신설하고 싶었으나 예산 문제로 1곳에 그쳤다”며 “앞으로 예산을 확보해 센터도 더 늘리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