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연구개발(R&D)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예타) 제도가 혁신성이 크고 도전적인 사업에 대한 평가를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2일 대전 유성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국가 연구개발(R&D) 사업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개편 공청회'에서 이런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R&D 예타 제도 혁신안을 내년 초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공청회는 지난 9월 발표한 R&D 예타 제도개편 과정에서 연구현장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마련됐다.
예타는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대형 사업에 대해 미리 타당성을 따지는 제도다. 외환 위기 직후인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무분별한 토건 사업과 세금 낭비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면서 국가의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 되는 건설, 정보화, 국가연구개발 사업 등이 대상이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내년 초 공개될 R&D 예타 제도 개편방안은 혁신성이 크고 도전적인 R&D 사업에 대한 평가를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된다. 기존에는 통과와 탈락 중심으로 운영됐지만 새 개편안에서는 기획의 완성도 중심으로 개편해 불확실성이 큰 사업도 추진할 수 있게 했다. 국가적으로 시급한 혁신 사업에 대한 예타 면제 근거를 명확히 하고, 예타 면제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최근 R&D 사업이 급증하면서 나타난 사업 관리 문제, 과도한 기획·평가가 행정 부담을 주고 있어 이를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계속사업을 예타 대상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실제로 지난 2015년 426개이던 R&D 사업은 올해 1266개까지 늘어났다. 부처 고유 임무에 부합하는 예타 규모 미만 사업들을 계속사업으로 통합해 다시 기획한 경우에만 예타 신청이 가능하고 예타에 통과해 사업을 추진할 때 주기적으로 사업 규모나 계속 지원 필요 여부를 점검하기로 했다.
과기정통부는 또 R&D 예타 제도개편이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부처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각 부처는 예타를 요구할 때 원칙적으로 공식적인 신규 가용재원 내에서 자율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여 신청하고, 예타 통과사업은 소관 부처별 지출한도 내 예산으로 편성하도록 했다.
주영창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이번 제도개편을 통해 국가R&D사업의 파편화를 해소하고, R&D사업이 보다 연속성 있게 추진되도록 하겠다"며 "R&D의 불확실성을 적극 고려하여, 세계 최고 수준에 도전하는 혁신적 연구가 적기에 추진될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열린 토론에는 건국대 행정학과 김준모 교수를 비롯해 윤혜온 기초과학연구원(IBS) 책임연구원, 신의섭 전북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김현철 한국연구재단 공공기술단장, 김병우 울산대 전기공학부 교수, 김유식 과기정통부 성과평가정책국장이 참여했다.
김현철 단장은 "대형 연구시설 및 장비 구축 사업은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데 반해 기술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사업 수행 기간이 길어 일정 지연이나 사업비 증액이 자주 발생한다"며 "현재 예타 조사상으로는 기반조성형이라는 사업유형으로 분류되는 데 그쳐 사업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데, 순수 R&D 예산과 구분해 단계별 예타를 도입하는 등 차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1단계로 사업비와 사업 기간에 대한 예타를 거쳐 선정된 사업을 중심으로 2단계 기본·상세 예타를 추가 진행하는 방안이다.
김병우 교수는 예타 지표 설정과 관련해 "예타의 운영에 있어서도 객관성·공정성을 이유로 평가 지표를 정량화하는 타성에 젖어있다. 엔지니어 그룹도 이를 고민해야 한다"면서 "이를테면 R&D 사업의 대형화·복합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므로, 융·복합 관점에서도 예타 기준을 설정해 연구 문화를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 연구자는 "예타 개편안 자체보다도 기존 제도들과의 상충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부처 고유 임무에 부합하는 예타 규모 미만 사업들을 계속사업으로 통합·재기획하겠다는 안의 경우, 부처 고유의 임무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할 경우 부처들이 이를 오히려 예산 증액의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고, 기존 일몰제와도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나 연구기관의 기획 역량에 따라 예타 완화의 혜택도 빈익빈 부익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