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섬유로 만든 누리호 추진제 탱크입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탱크보다 무게를 30%나 줄이면서 안정성은 그대로입니다. 헤리티지가 없어 실전 경험은 아직 없습니다. 위험부담이 적은 소형 발사체 용도로 개량해 앞으로 3년 내에 우주로 쏘아 올리는 게 목표입니다.”

지난 28일 경남 진주에 있는 우주항공 설계분석 기업인 ANH스트럭쳐 공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구조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통 모양의 탱크는 사람 키를 훌쩍 넘을 만큼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실제 누리호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크기의 추진제 탱크다. 안현수 ANH스트럭쳐 대표는 이 탱크를 소개하며 ‘헤리티지’의 문제점을 들었다. 우주 산업의 성능 혁신을 이끌 신기술을 개발했지만 정작 상용화는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헤리티지는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가치 있는 유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주항공업계에서는 조금 다른 표현으로 쓰인다. 우주항공업계에서는 헤리티지를 실전 경험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여러 차례 비행을 통해 성능과 안정성을 검증한 부품을 사용해야 하는 특성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새로운 제품을 만들더라도 상용화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ANH스트럭쳐가 개발한 탄소섬유 기반 추진제 탱크. 무게를 30% 줄여 발사 비용을 절약할 수 있으나 '헤리티지'가 없어 실전 경험은 없다./진주=이병철 기자

안 대표는 “미국의 재사용발사체 기업 스페이스X가 지금의 혁신적인 발사체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업계의 헤리티지 문화를 타파하고 신기술을 적극 도입한 덕분”이라며 “국내 우주 스타트업과 협력해 실전 비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ANH스트럭쳐는 항공기 구조 설계, 해석으로 시작해 최근에는 신소재를 이용한 부품을 만들고 있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우주 산업으로 정하고 그간 쌓아 온 기술을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탄소섬유 추진제 탱크의 가치를 보고 이미 160억원을 투자했다. 공장 한 켠에 마련된 ‘클린룸’에는 ‘자동섬유적층(AFP)’ 장비를 마련했다. 얇은 탄소 섬유를 겹겹이 쌓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는 장치다. 가공을 위한 설비도 이미 도입을 끝냈다. AFP로 만든 형태를 굳히기 위한 열처리, 재가공을 위한 워터제트 장치도 일렬도 배치해 본격적인 생산 준비가 끝난 상황이다.

안 대표는 “항공기 산업에서는 이미 탄소 소재로 전환이 이뤄졌지만, 우주 분야는 아직 금속을 사용하고 있다”며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경쟁력 있는 제품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도전은 재사용이 가능한 열가소성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다. 탄소 섬유는 한번 열처리를 하면 재사용을 하지 못하는 열경화성 소재다. 열가소성 소재는 한번 정해진 형태를 바꿀 수 있어 필요한 형태에 따라 재가공이 가능하다. 안 대표는 “현재 열가소성 소재의 성능은 탄소 섬유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그간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던 것뿐”이라며 “추후 성능 개선의 여지가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ANH스트럭쳐는 탄소섬유로 발사체 부품을 제작할 수 있는 장비를 모두 구비해 양산에 대비하고 있다. 탄소섬유 기반 추진제 탱크를 소형 발사체에 적용한 이후에는 본격적인 생산을 할 예정이다./진주=이병철 기자

29일 방문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공장에서도 미래 우주 산업의 먹거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KAI 공장에서는 한창 제작하고 있는 ‘차세대 중형위성’이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위성 제작 중 작은 먼지 하나가 들어가더라도 성능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는 만큼 입장 절차부터 복잡했다. 방진복과 방진모, 덧신을 쓰는 것도 모자라 에어샤워를 한 뒤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서현석 KAI 위성연구실장은 “지금 기준으로는 KAI의 위성 공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첨단 장비를 많이 갖췄다”며 “글로벌 기업에서도 협업 제의가 들어오고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둘러본 공장 내부에서는 2개의 위성이 특히 눈에 띄었다. 2m 정도 돼보이는 크기의 위성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KAI는 정부의 R&D 지원을 받았던 차세대중형위성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우주 산업 주요 제품으로 위성을 지목했다. 초소형·소형 위성 기술까지 갖춘 만큼 크기별 위성 군집 운용으로 활용도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중형 위성을 조립하고 있는 모습. KAI는 위성 양산을 염두하고 생산 공정 효율화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한국항공우주산업

서 실장은 “이들 위성은 같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지만 각각 광학 관측과 광범위 관측을 수행할 예정”이라며 “특히 광범위 관측은 한번에 수㎞를 동시에 촬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장 한 편에는 우주로 쏘아올리기 전 안정성을 시험할 장비도 모두 마련돼 있었다. 우주의 온도는 하루에도 수백도씩 차이가 나고 발사 과정에서는 강한 진동과 열이 발생해 자칫하면 작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고장 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지상에서 우주와 비슷한 환경에 노출해 극한 환경에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날도 새 위성에 들어갈 장비의 시험이 한창 이뤄지고 있었다. 열진공시험장에 들어서자 다양한 크기의 챔버가 줄지어 있었다. 진공 상태에서 극한의 온도 변화를 모사해 위성의 안정성을 시험하는 장비다. 바로 옆에 있는 발사환경시험장에서는 발사시에 위성이 받는 진동을 모사하는 장치가 있었다. 그 위에서는 조립을 앞두고 있는 ‘종합탑재컴퓨터(IBMU)’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 실장은 “위성 전체를 통제하는 IBMU는 일종의 컴퓨터 같은 장비”라며 “부품 단계에서 안정성 시험을 거친 후 위성을 조립해 다시 시험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KAI도 위성 양산을 염두하고 제작과 시험에 필요한 대부분 장비를 도입했다. 공장 내부에서 생산하고 성능 시험까지 한번에 이뤄질 수 있게 해 공정을 최적화한다는 전략이다. 위성을 산업화하려면 먼저 해결해야 하는 대량 생산을 위한 포석이다. 위성뿐 아니라 누리호 사업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발사체 사업으로의 확장까지 계획하고 있다.

위성 산업은 앞으로 커질 우주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성장 분야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우주 산업의 후발주자로 남아 있다. 문제는 지구 궤도를 도는 위성이 점차 포화되면서 규제가 강화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강원석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 전략기획실장은 “미래 우주 산업의 핵심은 정보통신이 될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에서 1만대 이상의 위성을 쏘아 올리는 계획이 나오면서 규제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규제를 비롯한 여러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면 우주항공 정책의 콘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윤승욱 케이피항공산업 대표는 “한국은 우주항공산업의 후발주자인 만큼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한 시기”라며 “정부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