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윤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해 4월 충북 청주 오창 다목적방사광가속기 공사 현장을 방문했다. 방사광가속기는 빛의 속도에 가깝게 입자를 가속해 물질의 구조를 보거나 새로운 입자를 만드는 장치다. 이미 국내에도 이런 장비가 여러대 있으나 최근 연이어 인상된 전기료로 운영에 난항을 겪고 있다./뉴스1

포항가속기연구소는 지난달 방사광가속기의 운영을 단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 운영계획을 연구자들에게 알렸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한 뒤에 발생하는 빛을 이용해 원자와 분자 단위의 이미지를 촬영하는 장비다. 부품소재와 신약 개발과 같은 첨단산업의 원천기술 확보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연구 시설이다. 갑작스러운 운영 기간 단축에 연구자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참고 [단독] 포항방사광가속기도 전기료 부담에 가동 단축) 앞서 8월에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운영하는 대용량데이터허브센터의 클러스터장비 절반이 가동을 멈췄다.

국가 과학기술의 핵심 연구장비가 이렇게 갑자기 멈춘 건 전기료 낼 돈이 없어서다. 올해 전기료가 폭등했지만 정작 전기료를 내는 데 쓰는 경상비는 삭감되면서 연구기관들이 울며겨자 먹기로 가동을 멈춘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을 통해 올해 공공기관 경상비 3%를 삭감했다. 경상비는 전기료, 인건비, 세금을 비롯해 기관 운영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예산 항목이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3%라는 수치가 작아 보일 수 있으나 인건비, 시설 유지보수 비용 같은 고정비용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운영 부담은 매우 큰 상황”이라며 “수십억 원에 달하는 대형 연구시설의 전기료를 충당하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기료 낼 돈이 없어서 첨단 연구시설을 멈추는 일이 반복되자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책임론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윤영찬 의원은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슈퍼컴, 방사광가속기, 중이온가속기 등은 모두 지금 전기료 문제 때문에 가동이 일부 중단되거나 늦춰지는 이런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성경 과기정통부 1차관은 “전기요금 때문에 연구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과연 조 차관의 말대로 이런 문제가 내년에는 사라질까. 심지어 내년 정부 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상황에서 말이다.

포항가속기연구소 조감도. 포항가속기연구소는 지난달 방사광가속기의 운영을 단축하겠다고 연구자들에게 공지했다. 인상된 전기료로 인해 운영을 줄이겠다는 조치였다./포항가속기연구소

현장 연구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대형 연구시설을 운영하는 한 출연연 관계자는 “전기료에 대한 정부의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연구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연구자들 사이에 퍼져 있다”며 “기관별로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과기정통부도 연구 현장의 전기료 부담을 인지하고 10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현황을 조사했다. 올해 예산 대비 실제 지출한 전기료 현황을 제출하라는 요구에 한때 과학계에서는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기대감이 나왔다.

정작 정부는 대책을 내놓을 계획이 없다고 일축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전기료 실태조사를 한 것은 맞지만, 현재로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을 계획은 없다”며 “내년 예산과 관련해 과기정통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난 상황”이라고 말했다.

연구기관이 올해 말까지 지출할 전기료는 작년보다 20~30% 늘어날 전망이다. 내년부터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경상비 5%를 절약해야 하고, 예산 삭감으로 인한 사업비도 줄어 장비 운영은 더욱 어려워진다. 한해에만 수십억원의 전기료가 드는 대형 연구시설을 운영하는 기관 입장에서는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 말고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연구로 ‘하나로’의 전기료는 연간 약 1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양성자가속기도 30억원치의 전기를 매년 사용한다. 내년에는 두 장비를 더해 60억원 이상의 전기료를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중이온가속기 라온도 본격적인 가동을 앞두고 전기료 부담에 가동 시기를 조절해 비용을 절약한다는 계획이다.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형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수소와 헬륨의 핵융합 반응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핵융합의 핵심 기술을 연구하는 이 장치의 연간 전기료는 50억원 수준이다. 핵융합연 관계자는 “내년에도 전기료 인상의 가능성을 염두해 사업비에서 85억원 이상을 전기료로 배정해 운영에 차질이 없게 할 계획”이라며 “진단 장치 개선과 추가 개발 예산을 줄이고 실험에 초점을 맞춰 운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출연연 관계자는 “정부의 대책을 기다려 왔으나 이제는 기대감마저도 접은 상태”라며 “장비 운영을 중단할 수도 없어 다른 연구 예산마저도 전기료에 투입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