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편집자 주]

지난 6월 1일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반도체 설계 검증 인프라 활성화 사업’ 추진을 위한 협약식과 현판식이 열렸다. 서울대학교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국가나노인프라협의체 등 여러 기관이 협약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종호 장관은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반도체 인재 양성은 매우 중요하다”며 “우리나라가 보다 효율적으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쟁국과 차별화된 방안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6월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왼쪽은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대통령실

이 사업은 반도체 전문가인 이종호 장관이 직접 공을 들인 사업이다. 이 장관은 비메모리 산업의 표준 기술인 ‘벌크 핀펫’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반도체 전문가다.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의 석학회원(펠로)에 선출된 세계적인 석학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6월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각 부처가 특단의 노력을 하라고 지시하자 이 장관이 직접 반도체 설계 검증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지시하고 장관이 직접 발 벗고 나선 사업이 1년 만에 좌초 위기에 놓였다. 예산이 반토막났기 때문이다.

반도체 설계 검증 인프라 활성화 사업은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무료로 반도체 칩을 제작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학생들이 반도체 칩을 설계하면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있는 반도체 팹(Fab)에서 500㎚ CMOS(상보형 금속 산화막 반도체) 기술을 이용해 직접 제작한다. 설계한 반도체가 어떤 지에 대한 피드백도 함께 제공한다.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같은 대기업이 보유한 시설보다 규모는 작지만, 반도체 공정을 1부터 100까지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사업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실전에 가까운 반도체 설계 경험을 쌓고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라며 “매년 500~1000명 가까운 학생이 실제 반도체 칩을 제작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4분기 시범 서비스에 돌입했지만 당장 내년, 내후년에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처지다. 사업의 핵심인 설비구축을 위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픽=정서희

반도체 설계 검증 인프라 활성화 사업은 올해 12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는데, 내년에는 60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과기정통부는 2025년까지 303억원을 투입해 이온주입장비를 비롯해 13종의 반도체설계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범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예산이 반토막나면서 장비구축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과기정통부가 국회에 제출한 세부 사업 내역을 보면 내년에 장비구축에 쓰려고 한 예산은 당초 115억원이었다. 2025년에도 110억원을 투입해 조기에 장비구축을 마무리하고 인력 양성에 나선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내년에 확정된 예산안 15억원으로 당초 계획보다 100억원이 줄었다. 장비구축 완료 시점도 2027년으로 당초 계획보다 2년 늦어졌다.

2025년에는 당초 계획보다 많은 135억원을 투입하고, 2026년과 2027년에도 각각 38억5000만원과 36억5000만원을 투입한다는 게 과기정통부의 새로운 계획이다. 하지만 국가 재정 상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2025년 이후에 계획대로 예산을 투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업에 참여하는 한 대학 관계자는 “장비 구축이 예정대로 진행돼야 매년 12회 제작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며 “갑자기 예산이 10분의 1로 줄면서 사업 자체가 동력이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인력 양성이 시급한 상황에서 사업이 지연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2031년 국내 반도체 산업의 인력 부족이 5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실무능력을 갖춘 반도체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없던 사업도 만들어야 할 판에 기존에 있던 사업 예산을 반토막내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는 지적이다.

한 지방국립대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는 “지역에서는 반도체 공정을 경험할 수 있는 팹을 갖춘 시설이 부족해 학생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게 할 중요한 기회가 될 거라고 봤는데 예산이 줄어 아쉽다”며 “반도체 현장에서 느끼는 인력난의 심각성을 정부는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