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R&D 예산안은 전년대비 16.6% 삭감된 25조9000억원이다.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에서 3.9%로 줄었다. 33년 만의 예산 감축에 과학기술계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수십 조원에 달하는 방대한 예산안 앞에서 정작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한 예산이 삭감됐고, 이 와중에 어떤 예산은 왜 늘었는지 제대로 아는 국민은 없다. 조선비즈는 국회 예산안 심의 시즌을 맞아 내년도 R&D 예산안에서 꼭 필요한 예산이 삭감된 건 어떤 부분인지, 늘어난 예산 중에 낭비성 예산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편집자 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각각 제출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투자우선순위에 대한 의견과 국가연구개발사업 관련 중기사업계획서 및 예산요구서에 대하여 과학기술자문회의의 심의를 거쳐 그 결과를 매년 6월 30일까지 기획재정부장관에게 알려야 한다.-과학기술기본법 제12조의2제5항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 수립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법과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예산을 삭감한 점이나 수월성 위주로 R&D 제도와 투자 방향을 갑자기 전환한 것도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부적절한 절차’에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행 과학기술기본법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요 R&D 사업에 대한 예산 배분·조정안을 마련해 6월 30일까지 기획재정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주요 R&D 예산은 전체 국가 R&D 예산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사실상 이듬해 R&D 예산과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절차인 셈이다.
이는 최근 10년간 R&D 배분·조정안이 단 한 차례도 과학기술기본법이 정한 기한을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2014년에는 법률상 기한일인 7월 30일에 제출됐고, 2015년에는 법률상 기한일인 7월 15일 닷새 전인 7월 10일에 제출됐다. 법률상 기한일이 6월 30일로 고정된 2016년부터도 항상 기한을 지켰다.
조성경 과기정통부 제1차관은 지난 9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관련 질문에 “이전에도 7월을 넘긴 적이 있다”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당시는 법률상 기한일 자체가 7월이었기 때문에 사실과 거리가 먼 답변이다. 조 차관의 설명과 달리 지난 10년간 과기정통부가 법률상 기한일을 어긴 적은 없었다.
올해도 처음 계획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주요 R&D 배분·조정안 심의를 맡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는 지난 6월 26일 운영위원회를 개최했다. 여러 취재를 종합해보면 이 단계에서는 주요 R&D 예산을 포함해 내년도 역시 국가 R&D 예산을 올해보다 5% 정도 늘릴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월 28일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날 주재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예산 전면 재검토 지시를 내리면서 이 계획을 지키는 게 불가능해졌다.
결국 과기정통부는 두 달에 걸쳐 R&D 예산 재검토에 나섰다. 그리고 지난 8월 21일과 8월 22일 이틀에 걸쳐 운영위원회와 심의회의를 열고 주요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확정했다. 법정 기한일인 6월 30일을 두 달여 가까이 넘긴 뒤였다. 대통령 한 마디에 정부 부처가 법으로 정해진 기한을 위반한 것이다.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통령 말 한 마디에 모든 절차가 무력화돼 버렸다”며 “구멍가게도 이렇게는 안 한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갑작스런 재검토 주문에 법 위반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을까. 법을 위반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과기정통부가 처음 편성한 예산안을 기획재정부에 일단 제출하고 기재부가 이 예산안을 수정하는 단계에서 윤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을 반영해도 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전에도 과기정통부가 제출한 R&D 예산안은 기재부가 경제 사정과 이런저런 이유로 손을 봐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예산안의 경우엔 기재부가 ‘적극 재정’을 이유로 과기정통부가 제출한 안보다 오히려 19.2%나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선택을 하지 않고 ‘법을 위반하는’ 쉬운 길을 갔다. 관가에서는 과기정통부가 예년처럼 R&D 예산 확대 기조로 편성한 ‘5% 인상안’이 공개되면 대통령실이나 기재부가 예산 삭감을 주도했다는 비판을 맨몸으로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R&D 예산을 올리려 했는데, 대통령실과 기재부가 이를 막아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과기정통부는 스스로 법을 어겨가며 예산안 제출을 늦췄고 8월 22일에야 기재부에 예산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과기정통부는 이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 운영위원회 단계까지 거친 예산안을 왜 기재부에 늦게 제출했는지, 원래 예산안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확인해달라는 국회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산 삭감을 문제 삼는 과학기술계의 비난은 과기정통부에 쏟아졌다.
과기정통부 한 관계자는 “과기정통부에선 처음엔 예산안 삭감의 ‘삭’ 자도 나온 적이 없었다”며 “결과적으로 과기정통부만 과학기술계와 여론, 야당의 욕받이가 됐다”고 말했다.
R&D 예산안 제출이 늦은 데다 재검토 과정까지 부실하게 진행되면서 곳곳에서 갈등과 문제를 낳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7~8월 예산 재검토 과정에서 사업별 예산배분조정이 이뤄졌고, 내년도 예산안은 기술분야별 전문위원회 의견과 부처 투자 우선 순위, 국가 재정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운영위원회와 심의회의를 거쳐 확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산 재검토 과정에 절차적인 문제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선 과기정통부의 해명에 설득력이 없다는 시각이 많다. R&D 예산 편성 과정을 잘 아는 한 과학기술계 인사는 “2024년도 예산안은 처음 마련한 것과 방향과 내용이 180도 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그렇다면 투자방향 공청회를 비롯해 연구현장의 의견수렴을 하는 절차도 다시 했어야 하는데 이런 공개적인 절차는 과기정통부가 모두 생략했다. 절차에 문제가 없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해명”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