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소식에 이공계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가뜩이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청년 연구자들의 사기가 꺾인 상황에서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우수 인재가 이공계 대신 의대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는 3058명으로 묶여 있는 의대 입학정원을 2025년부터 대폭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원 확대 규모가 1000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7일 의대 정원 확대 소식에 이공계 대학의 교수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지금 학령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데 의대 정원 증원 규모가 굉장히 크다”며 “의대 정원이 이렇게 많이 늘어나면 이공계는 물론이고 문과까지도 몰락이 가속화될 수 있다. 다른 분야에 미칠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명예교수는 “지금도 의대 간다고 중퇴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이런 현상이 급격하게 가속화될 것”이라며 “가장 직격탄을 맞는 곳은 중하위권 대학일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는 이공계에 대한 홀대가 이어지는 가운데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문제가 가속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박사후연구원이라고 해도 의대의 반토막에 불과하다”며 “IMF 외환위기 때 이공계에 대한 기피 현상이 시작됐는데 이런 식으로 이공계를 홀대하면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 역시 R&D 예산 삭감과 의대정원 증원의 시너지를 걱정했다. 그는 “상위권 대학은 학생 이탈이 심각해지고, 중하위권 대학은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올 것”이라며 “의대 쏠림의 폐해가 입시뿐 아니라 이공계 대학 재학생의 이탈로도 확대되면서 이공계 몰락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의 한 국립대 화학공학과 교수도 이 명예교수의 지적에 동의했다. 그는 “지방 국립대에서는 우수한 학생을 키우려고 해도 서울 지역의 학교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의대 정원이 확대되면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싶다”며 “지방 홀대나 이공계 인력 부족에 대한 해법 없이 의대 정원만 갑자기 늘리면 불균형만 더 심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의 한 대학 물리학과 교수는 의대 정원이 문제가 아니라 이공계에 대한 홀대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그는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 현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의대 정원보다도 이공계의 처우를 개선하는 방안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의대 정원 규모가 결정되면 의대 쏠림 부작용을 막을 방안도 함께 검토해 발표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