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행사장을 보더라도 청중 가운데 여성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율이 연구 현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지난 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서울 2023′ 행사에는 1000여명에 가까운 청중이 모였다. 노벨상 수상자를 직접 보기 위해 교복을 입은 채로 행사장을 찾은 10대 청소년이 적지 않았다. 얼핏 봐도 남녀 비율은 5대5 정도였고, 이따금 청중에게 질문 기회가 돌아갈 때면 마이크를 잡는 건 대부분 여성 청중이었다.

로라 스프레취만 노벨프라이즈 아웃리치 CEO가 24일 서울 코엑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스프레취만 CEO는 다양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지원과 여성 과학자들의 멘토링을 강조했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

로라 슈프레크만(Laura Sprechmann) 노벨프라이즈 아웃리치(NPO) 최고경영자(CEO)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목을 짚었다. NPO는 노벨재단 산하 기관으로 노벨상의 가치와 성과, 지식을 전 세계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21년 CEO에 취임한 슈프레크만은 NPO의 수장으로 특히나 다양성의 가치를 전파하는 데 신경쓰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과학분야에 처음 진입하는 시점에서는 성별 격차가 크지 않지만, 경력이 높아질수록 여성의 비율이 낮아지는 문제가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발견된다”며 “여성의 경우에는 출산과 육아로 인해 균등한 기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슈프레크만 CEO의 지적은 실제 숫자로도 확인된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국내 과학계에서 일하는 박사급 가운데 여성 인력은 12% 수준이다. 이공계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중 여성 비중이 24%인 점을 감안하면 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 중 절반은 연구 현장에서 사라진 셈이다.

여성과총이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2020년 공동 발표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국내 기업 연구소의 여성 중간 관리자 비율은 12%인데, 선임 관리자로 올라가면 7.5%로 낮아지고, 최고 관리자(임원)로 가면 4.1% 수준까지 떨어진다.

이렇게 연구 현장의 다양성이 약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생명과학 분야의 석학인 노정혜 서울대 명예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양성을 통해야만 수월성이 더 빛을 낼 수 있다”며 “여성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과학 연구의 성과와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서라도 다양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정혜 서울대 명예교수가 24일 서울 코엑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노 명예교수는 다양성은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창의적인 성과를 내기 위한 문제라고 강조했다./한국과학기술한림원

노 교수는 서울대 다양성위원회의 첫 위원장을 맡아 다양성보고서 발간 등을 주도한 바 있다. 서울대 다양성보고서는 서울대 교원과 교직원의 성 불평등을 정확하게 짚어내 서울대의 다양성 확산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다양성위원회는 국내 다른 대학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노 교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똑같은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도저히 풀리지 않을 때가 있는데 관점을 바꾸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있다”며 “이처럼 학문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들이 모였을 때 문제를 발견하거나 해결할 확률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한두 명의 스타보다 풀뿌리를 통한 집단지성이 창의적인 솔루션을 찾는 데는 더 낫다”며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은 기회를 덜 가진 사람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과학적인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수월성 중심의 연구 제도 개편은 다양성의 싹을 자르는 것이라고 노 교수는 지했다. 노 교수는 “연구를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어떤 연구가 미래에 빛을 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연구의 성과가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온다”며 “뿌리를 건강하게 하면서 열매를 튼실하게 만드는 노력을 해야지, 겉보기에 좋은 열매만 생각하고 풀뿌리를 없애는 건 수월성까지 해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 교수는 “국가 R&D 예산에서 기초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오히려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삭감을 한다는 건 젊은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정부가 기초과학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며 “지난 20년에 걸쳐 고도화된 우리의 기초연구 지원 시스템을 흔들면서 수월성을 강조한다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고 퇴보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