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 시즌이 돌아왔다. 10월 2일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3일 물리학상, 4일 화학상, 5일 문학상, 6일 평화상, 9일 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은 철저하게 비밀로 진행된다. 발표되기 직전까지 수상자 본인도 자신의 수상 여부를 모른다. 이 때문에 누가 수상자가 될 지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과학 부문 노벨상은 쟁쟁한 후보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예측이 어렵다.
글로벌 정보분석 서비스 기업인 클래리베이트(Clarivate)는 지난 9월 19일 논문 피인용 건수를 기준으로 올해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 후보를 발표했다. 클래리베이트의 엠마누엘 티보 부사장은 “후보에 오른 연구자들은 논문 피인용 횟수가 2000회를 넘는 흔치 않은 발견과 혁신을 이룬 인물들”이라며 “1970년 이후 피인용 횟수가 2000회 이상인 논문은 전체의 0.0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터넷 시대 가능하게 한 메모리 개발자·디지털 연금술사도 후보
올해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는 페데리코 카파소(Federico Capasso) 하버드대 교수와 스튜어트 파킨 막스플랑크연구소장, 샤론 글로처(Sharon C. Glotzer), 미시간대 석좌교수가 꼽힌다.
페데리코 카파소 교수는 양자폭포레이저의 발전을 이끈 연구자다. 양자폭포레이저는 일반적인 레이저보다 넓은 범위의 중적외선 파장 영역의 빛을 만드는 기술로 국방이나 의료, 통신 분야의 핵심적인 기술로 꼽힌다. 카파소 교수는 응용물리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중 한명이다.
스튜어트 파킨 소장은 스핀트로닉스 연구를 통해 데이터의 저장 밀도를 높이는 메모리를 개발한 연구자다. 이 기술은 대용량 하드디스크 개발로 이어져 빅데이터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에는 기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밀레니엄 기술상’을 받기도 했다. 이 상을 수여하는 핀란드 기술 아카데미는 파킨 소장의 연구에 대해 온라인에 파일을 올리는 클라우드 서비스나 사진과 영상을 공유하는 소셜미디어(SNS)가 가능해진 건 파킨 소장의 연구 덕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샤론 글로처 교수는 디지털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물질의 자기 조립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하는 역할을 증명하고, 조립 과정을 제어해 새로운 물질을 설계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한 과학자다.
◇윤석열 정부 첨단 바이오 조언자 제임스 콜린스 교수
클래리베이트는 노벨 화학상 수상 후보로 8명의 연구자를 선정했다. 분야별로 보면 합성생물학(3명), 차세대 DNA 염기서열 분석법(2명), 혁신적인 약물 전달법(3명)이다.
이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건 합성생물학 분야의 선구자로 불리는 제임스 콜린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의료공학 및 과학연구소 교수다. 콜린스 교수는 MIT와 하버드대가 함께 만든 브로드연구소의 핵심 인력이기도 하다. 합성생물학은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해 특정 물질을 생산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바이오 산업과 생명공학의 미래를 바꿀 기술로도 주목받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키우는 첨단 바이오 산업이 합성생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미국 국빈 방문 때 보스턴의 MIT를 직접 방문해 바이오 분야의 석학들을 만나 첨단 바이오 산업 육성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때 윤 대통령이 만난 석학 중 한 명이 콜린스 교수였다. 당시 콜린스 교수는 AI를 활용한 항생제 개발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콜린스 교수와 함께 마이클 엘로위츠(Michael Elowitz) 캘리포니아 공대 생물학 및 생물공학과 교수, 스타니슬라스 라이블러(Stanislas Leibler)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도 합성생물학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 후보에 들었다. 이들은 2000년 1월에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한 논문으로 합성생물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샹카르 발라수브라마니안(Shankar Balasubramanian)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데이비드 클레너먼(David Klenerman)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차세대 DNA 염기서열 분석 방법을 개발한 공로로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DNA 염기 순서를 분석해 유전 정보를 해독하는 게놈 시퀀싱 기술을 진일보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둘이 개발한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 기술은 게놈 서열 분석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둘은 1998년 솔렉사라는 회사를 차리기도 했는데, 이 회사는 2007년 생명공학 회사인 일루미나에 인수됐다. 솔렉사-일루미나의 NGS는 전 세계 DNA와 RNA 시퀀싱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2021년 브레이크스루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브레이크스루상 재단은 이들에 대해 “과거엔 인간 유전 정보를 해독하는 데 몇 달에 걸쳐 수백만 달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600달러로 하루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일본 과학자도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가타오카 가즈노리(片岡一則) 도쿄대 명예교수는 블라디미르 토르칠린(Vladimir P. Torchilin) 미 노스이스턴대 약학대학원 석좌교수, 캐런 울리(Karen L. Wooley) 텍사스 A&M대 석좌교수와 함께 혁신적인 약물 전달법을 개발한 공로로 후보에 올랐다.
가즈노리 교수는 뇌에 약을 운반할 수 있는 초소형 캡슐을 개발한 과학자다. 인간의 뇌에는 포도당을 제외하고는 혈액 속의 물질이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알츠하이머 같은 뇌 질환 치료를 위한 방법을 찾더라도 약을 운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가즈노리 교수는 아미노산을 이용해 직경이 1㎜의 3만분의 1 수준의 초소형 캡슐을 개발했다. 캡슐 표면에 포도당을 씌워서 뇌혈관의 특정 단백질과 결합해 뇌 속으로 운반하는 기술이다.
영국의 화학전문지 케미스트리월드는 조금 다른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들은 1260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자를 추렸는데 여기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인물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오마르 야기(Omar Yaghi) 교수다. 오마르 야기 교수는 금속-유기 골격을 통한 그물화학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차세대 수소저장물질로 불리는 MOF를 최초로 개발한 인물이기도 하다.
네이처의 물리화학 저널 편집장인 스튜어트 캔트릴이 소셜미디어에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도 관심을 끈다. 주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뽑아달라고 진행한 투표에서는 응답자의 44.5%가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을 꼽았다. 이어 금속유기구조체(20%), DNA 합성·서열분석(17%)의 순으로 나왔다.
mRNA 백신의 기초 기술은 2005년에 나온 논문에 담겨 있다. 지금은 백신의 어머니로 불리는 카탈린 카리코 독일 바이오엔테크 수석 부사장과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노벨상 수상 후보로 계속 거론되는 중이다.
아쉽게도 이번 노벨상 수상 후보 중에 한국인 과학자의 이름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해외 과학 커뮤니티의 설문조사 결과에서만 한국인 과학자가 몇 명 이름을 올린 정도다. 유의미한 표를 받은 건 박남규 성균관대 석좌교수와 김빛내리 서울대 석좌교수,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