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을 다룬 영화 '노예 12년' 한 장면./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흑인 노예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수많은 노예의 비참한 삶이 역사로 남지 못한 것이다. 과학이 아메리카대륙 흑인 노예의 역사를 복원했다. DNA를 통해 중남미에 백인보다 앞서 흑인 카우보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미국의 제철소에서 고된 노동을 하다 이름 없이 죽어간 흑인 노예들의 후손도 DNA로 찾아냈다. 누군가 지우려 했던 어두운 과거가 과학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7세기 아프리카에서 소와 목동 함께 수입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만든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는 남북전쟁 후 자유인이 된 흑인 총잡이가 말을 타고 나온다. 서부영화하면 으레 백인 카우보이가 나오던 도식을 깬 것이다. 영화 배경보다 2세기나 앞서 실제로 중남미에 흑인 카우보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DNA 분석을 통해 제기됐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 22일 카리브해와 멕시코에서 나온 400년 된 소의 뼈를 통해 중남미에서 처음 소를 키운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미국 플로리다대 자연사박물관의 로버트 구랠닉(Robert Guralnick) 교수와 니컬러스 델솔(Nicolas Delsol) 박사 연구진이 발표한 이번 연구 결과는 지난달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렸다.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3년 두 번째 항해에서 스페인에서 가져온 소를 처음으로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 섬에 내렸다. 히스파니올라 섬은 왼쪽은 아이티, 오른쪽은 도미니카 공화국이 됐다. 이후 1500년대 후속 항해를 통해 유럽에서 가져온 소 500마리가 나중에 아메리카대륙 전체로 퍼져 엄청난 수로 늘었다.

중남미 유적지에서 나온 소뼈의 미토콘트리아 DNA 계통도. 대부분 유럽 계통이지만 일부는 아프리카 계통(맨 오른족 주황색)으로 나타났다./Scientific Reports

연구진은 박물관들을 돌아다니며 멕시코와 히스파니올라 섬에 처음 도입된 소의 흔적을 찾았다. 연구진은 멕시코와 아이티의 초기 스페인 식민지에서 발굴한 소뼈 21점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유럽과 아프리카산 소와 비교했다. 세포핵 밖에 있는 에너지 발생기관인 미토콘트리아는 별도로 DNA를 갖고 있다. 미토콘트리아는 난자를 통해 후손에 전달되므로 모계 유전자를 추적하는 데 주로 쓰인다.

분석 결과 유럽인이 도착하고 1세기 동안 소는 대부분 스페인에서 온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멕시코 시티 중심부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나온 뼈는 아프라카산 소와 DNA가 일치했다. 이 뼈는 1600년대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아프리카산 소를 수입했다고 알려진 기록보다 100년은 앞선 것이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역사연구원의 에두아르도 코로나 마르티네즈(Eduardo Corona Martinez) 박사는 사이언스에 “새로운 증거를 통해 복잡한 역사가 드러났다”며 “처음에는 이베리아반도나 유럽 본토에서 소를 수입했다가 나중에는 아프리카산 소를 수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아프리카산 소를 수입한 것은 아프리카산 소가 카리브해와 멕시코의 열대 기후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델솔 박사는 “덥고 습한 환경에 더 잘 맞는 소가 수입처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산 소의 수입은 노예무역도 불렀다. 유럽인이 오기 전에 중남미 원주민은 소나 돼지, 양과 같은 대형 가축을 본 적이 없었다. 연구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은 중남미에서 목축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했다”며 “아프리카 목동들은 열대 환경에서 가축을 키우는 데 필요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역사 기록에 따르면 1600년대 초 노예무역은 오늘날 카메룬의 풀라니(Fulani)족에 집중됐다. 이들은 목축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번 DNA 분석 결과는 같은 시기 소가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혀 당시 소와 목동이 함께 하나의 결합 상품으로 아프리카에서 수입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그래픽=정서희

◇미국 제철소에서 일한 아프리카 흑인 노예

중남미에 흑인 카우보이가 있었다면 북미에서는 제철소 용광로에서 일한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미국 하버드 의대의 데이비드 라이히(David Reich) 교수와 유전자 분석업체인 23앤드미(23andMe)의 에다오인 하니(Éadaoin Harney) 박사 연구진은 지난달 2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19세기 메릴랜드주의 제철소에서 일했던 흑인 노예들의 후손을 DNA 검사로 찾아냈다”고 밝혔다.

오늘날 미국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의 대다수는 1501년에서 1867년 사이에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온 아프리카인 노예 수십만명의 후손이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없어 조상을 확인할 길이 없다. 1774년에서 1850년 사이 메릴랜드주의 캐탁틴 제철소에서 일한 흑인 노예나 자유인 수백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성(性)도 없이 이름으로만 불리다가 죽으면 아무 기록 없이 공동묘지에 묻혔다. 노예 매매 기록에만 가끔 이름이 나올 뿐 가족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1979년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캐탁틴 제철소에서 일하다 죽은 흑인 유골들이 나왔다. 연구진은 당시 캐탁틴 제철소 공동묘지에 묻힌 흑인 노예 27명의 DNA를 분석했다. 이를 23앤드미 가입자 1000만명의 DNA 정보와 대조했다. 그 결과 미국 전역에서 4만1799명이 당시 흑인 노예들과 DNA에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고 나왔다.

그중 500여명은 9촌 이내의 친척으로 나타났다. 일부는 직계 후손일 가능성도 있었다. 특히 DNA 일치도가 높은 사람들은 메릴랜드주에 집중됐다. 캐탁틴 제철소에서 일했던 흑인들이 근처에 그대로 남았다는 의미이다. DNA 분석 정보에 따르면 캐탁틴 제철소에서 일한 흑인들은 서아프리카의 울로프(Wolof)족과 중앙아프리카의 콩고(Kongo)족과 가장 가까웠다.

서머스 가족의 여성들이 증조부인 에모리 서머스의 가족 사진을 보고 있다. 에모리는 19세기 미국 메릴랜드주의 캐탁틴 제철소에서 일했던 핸슨 서머스의 아들이다./스미스소니언 채널

◇뼈가 휘고 빠지는 중노동에 시달려

흑인 노예들은 당시 제철소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것으로 밝혀졌다.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의 더글러스 오슬리(Douglas Owsley) 박사는 DNA 분석 전에 공동묘지에서 나온 유골로 생전 건강상태를 추적했다. 무덤 32개 중 절반 가까이 4세 미만의 어린이 유골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비타민D 결핍으로 인해 하반신이 구부러지는 구루병 흔적이 보였다. 제철소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햇빛을 가려 피부의 비타민D 합성을 감소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뼈에서는 납과 아연 같은 중금속 수치가 높게 나왔다. 삽으로 철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는 작업을 하다가 중금속에 중독된 것으로 추정됐다. 19세기에는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늙어 죽었다. 아니면 여성들이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그런데 캐탁틴 공동묘지 무덤의 32명 중 5명은 10대 소년이라는 점에서 그와 달랐다. 소년들이 숙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을 하다가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12~13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은 어깨 탈골이 있었고, 15세 소년은 허리 디스크가 확인됐다. 이는 당시 선교사들이 노예들의 비참한 노동 현장과 삶을 기록한 것과도 일치한다.

사이언스지는 지난달 3일 기사에서 23앤드미 가입자인 86세의 아그네스 잭슨(Agnes Jackson)이 DNA를 통해 1834년 17세에 캐탁틴 제철소로 팔려온 흑인 노예 핸슨 서머스(Hanson Summers)의 증손녀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머스는 15년 후 인근 제련소로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제철소의 흑인 노예는 점차 아일랜드와 영국, 독일 등에서 온 유럽 이민자로 대체됐다. 이후 흑인들의 흔적은 사라졌다.

잭슨의 증소할아버지 서머스는 공동묘지가 폐쇄되고 나서 반세기 뒤에 사망했다. 캐탁틴 제철소 역사협회는 이번 연구와 별도로 잭슨이 서머스의 후손임을 밝혔다. 잭슨은 지금도 캐탁틴 제철소 근처에 살고 있지만 지난 6월에야 처음으로 딸들과 함께 제철소 유적지를 찾았다. 잭슨은 사이언스지에 “우리가 이곳 사람들과 연결됐다는 사실을 몰랐다”며 “(우리 조상들은) 노예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잭슨은 공동묘지의 유골 27명 중에도 혹시 친척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조상이 캐탁틴 제철소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23앤드미가 가입자들이 처음에 과학연구를 위해 DNA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는 동의서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동의서에 따르면 DNA 정보는 익명으로 처리되며 결과는 직접 제공되지 않는다.

참고 자료

Scientific Reports(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98-023-39518-3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e4995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k0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