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안이 삭감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가운데 현장의 연구자와 학생들이 정부의 정책 자체가 잘못됐다는 목소리를 냈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실과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연총)는 25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과학기술 연구 환경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노환진 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와 권성훈 국회 입법조사관, 문성모 한국재료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발표자로 나섰다.
노 전 교수는 30년 가까이 변하지 않는 정부의 R&D 정책을 지적했다. 1996년 도입된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연구자와 대학, 연구기관이 경쟁을 통해 연구 과제를 수주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연구 비효율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모든 연구자를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게 아니라 대학과 출연연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 전 교수는 “과학자들은 연구기관이 일차원적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PBS를 계속 반대해왔지만, 3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며 “선진국들은 대학과 출연연, 국책연구소의 역할을 정해서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야 할 연구와 장기적인 연구를 나누는 데 한국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선진국은 연구에 정부가 간섭하지 말라는 정책원칙이 있고, 과학기술은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유연하게 운영해야 하고 우수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하지만 정부는 유연한 관리를 방만한 관리로, 우수한 사람에게 연구비 주는 것을 나눠 먹기로, 동료평가를 담합으로 규정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국가가 성장을 못한다”고 강조했다.
문성모 한국재료연구원 책임연구원도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가 나오기 위해선 최적의 연구환경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문 책임연구원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선 ‘독성 리더십’이 없어져야 한다”며 “권력 남용과 소통 부재, 공감 부족, 갈등적 환경 야기와 같은 독성 리더십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PBS로 연구성과 경쟁보다는 수주 경쟁만 일어나 성공률이 높은 연구만 찾게 되고 정부가 간섭해 자율성마저도 부족하다”며 “R&D는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만큼 하위 20% 연구 구조조정보다는 상위 연구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토론회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학원과 학부를 대표해 학생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이공계 우수인력 양성 정책과 처우 개선 문제를 제기했다.
이동헌 KAIST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지만, 현재 이공계는 박사학위 과잉과 노동시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며 “현재 R&D 예산안으로는 이공계 최우수 인재 양성 정책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정현 KAIST 학부 부총학생회장은 “현재 정부의 정책 소통은 통보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과학기술인 정책을 하면서 소통은 필수불가결이고, 처우 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과학자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전문기자는 “효율적인 R&D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다가올 위기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며 “기초연구가 많이 삭감되면서 연구자들의 좌절감이 큰데 국회가 공을 받아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토론회를 개최한 안철수 의원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큰 패러다임의 변화는 미국과 중국의 과학기술 패권 전쟁이고, 한국의 생존전략은 남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과학기술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인 만큼, R&D 예산 자체를 줄이는 것보다 예산을 사용하고 감독한 정부의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