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초과학연구 예산 삭감 관련 긴급간담회'에서 국내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모여 정부의 내년 R&D 예산안 삭감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이병철 기자

국내 기초과학 연구자들이 정부의 내년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 신진 연구자를 지원하는 기본연구 과제가 중단되고 이미 계약을 맺은 연구 사업의 단가가 삭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정부 계획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국내 연구 생태계가 황폐화되고 과학기술 경쟁력의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천승현 세종대 교수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초예산 삭감 관련 긴급간담회’에 참석해 “기초 연구를 지원하는 연구사업의 연구단가가 최대 40%가량 삭감됐다”며 “유일하게 삭감이 이뤄지지 않은 사업은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만든 한우물파기사업뿐”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초과학 분야 학회가 모여 결성한 기초연구연합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이날 긴급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내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문제점을 짚고 삭감안 철회를 요구했다.

내년 기초연구 예산안 분석 결과를 발표한 천 교수는 “신진 연구자를 지원하는 생애기본연구와 순수 연구를 지원하는 학문균형발전지원사업이 내년부터 중단된다”며 “이는 기초과학 생태계뿐 아니라 미래 연구 인력 양성에도 지원이 사라지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미 계약을 맺고 진행 중인 연구 사업의 과제당 예산을 삭감하는 문제도 지적됐다. 조승래 의원실을 통해 받은 예산안을 분석한 결과, 생애첫연구사업의 예산은 39.2% 삭감된다. 기본연구사업은 31.2%, 리더연구사업은 29.3% 삭감할 계획이다. 전체적으로는 10~40% 수준의 연구 예산 삭감이 이뤄지는 셈이다.

반면 한우물파기 기초연구사업은 단가 삭감을 피했다. 이 사업은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취임한 후 만들어져 올해 초 처음 시작됐다. 최대 10년 동안 한 연구 분야에 집중할 연구자를 발굴하기 위해 매년 2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천 교수는 “20년 이상 연구 현장을 지켜왔으나 이런 식으로 진행 중이던 과제의 연구비가 삭감된 사례는 처음”이라며 “현재 장관이 만든 사업을 제외한 모든 사업의 단가 삭감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천승현 세종대 교수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초과학연구 예산 삭감 관련 긴급간담회'에서 "이미 계약돼 진행 중인 연구과제의 내년 단가가 삭감된다"며 "장관이 만든 한우물파기 사업만 단가 삭감이 없다"고 지적했다./이병철 기자

이날 참석한 과학자들은 국제협력을 강조하는 정부의 R&D 정책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오경수 중앙대 교수는 “이미 뛰어난 실적을 내던 선도연구센터를 글로벌화 한다고 하면서 정작 연구비는 삭감했다”고 지적했다. 현재 계획에 따르면 선도연구센터 관련 연구 예산은 올해보다 7.7% 가량 줄어든다.

선도연구센터는 국내 핵심 연구 분야를 만들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집단 연구과제로 1990년 처음 만들어졌다. 과학계에서는 선도연구센터가 국내 과학계의 생태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 교수는 “당시 선도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은 연구자들이 대학 교수, 국책연구기관의 책임연구원으로 성장하면서 국내 과학을 이끌고 있다”며 “기초연구를 첨단 기술로 이어가 국내 기술 산업의 발달도 이뤄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한국의 자생적 기술성장이 필요한 연구 분야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글로벌적 요소를 강요하고 있다”며 “국내 과학기술 패권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현재 과학계는 국가 R&D 예산의 대폭 삭감과 국가 연구 근간을 뒤흔드는 연구 글로벌화 등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사태를 맞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