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Korea, a science spending champion, proposes cutbacks(과학 지출 챔피언인 한국, 예산 삭감을 제안하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가 19일(현지 시각) 한국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실었다. 과학 분야 지출의 챔피언이었던 한국이 예산 삭감에 나섰다는 제목의 기사는 언뜻 기본적인 사실만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기술계와의 제대로 된 소통 없이 진행된 R&D 예산 삭감이 기초과학 연구의 경쟁력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국내 연구자들의 우려를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사이언스는 이전에도 트럼프 전 행정부를 비롯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과학 예산 삭감을 추진하는 정부와 정치인들, 삭감이 야기할 문제들을 자세히 소개하는 등 세계 과학계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기사를 써왔다. 하지만 한국이 소재로 오른 건 처음이다.
과학기술계의 카르텔을 운운하며 정부가 추진했던 R&D 예산 삭감이 동력을 잃고 있다. 애초에 정부가 지목했던 카르텔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판정났고, 제대로 된 소통 없이 진행된 R&D 예산 삭감의 후유증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과학계의 원로부터 현장 연구자, 이공계 대학생까지 반대 전선에 서자 정부와 여당도 탈출구를 찾는 모습이다.
20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기초연구와 청년 연구자에 대한 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R&D 예산을 증액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미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정부가 단독으로 예산을 증액할 방법은 없다. 국회 예산 심사 때 여야 합의를 거쳐 삭감된 예산 가운데 일부를 되살리는 방안이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대통령실과 여당은 R&D 예산 삭감에 강경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의 반대가 생각보다 거세자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계에서 가장 크게 반발하는 기초연구에 대한 예산 삭감이다. 기초연구사업의 내년도 예산은 올해보다 6% 정도 삭감됐다. 대략 1537억원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1537억원이라는 숫자보다 구체적인 사업 내역이 바뀐 게 문제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기초연구사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기초연구사업 예산은 올해(1조6367억원)와 내년(1조6363억원)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연구자들이 크게 반발하는 건 개인기초연구사업의 촘촘했던 지원 체계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기초연구연합을 이끄는 정욱상 부산대 교수는 이를 사다리가 끊겼다고 표현했다. 개인기초연구사업은 연간 수천만원의 소액부터 7억원 이상의 우수연구과제까지 여러 단계로 구성돼 있다. 정 교수는 “이런 구조는 연구자가 신진-중견-리더 연구자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라며 “연구자의 성장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정부가 수월성을 내세우면서 소액 연구 사업을 없애면서 신진 연구자에 대한 지원이 사라질 처지에 놓인 것이다. 실제로 내년도 R&D 예산 삭감 내역을 살펴보면 박사 학위 취득 후 7년 이내 또는 만 39세 이하의 젊은 연구자에게 지원되는 ‘생애 첫 연구’ 사업의 예산 삭감률이 39.2%에 달한다. 이공학 분야의 개인기초연구를 지원해주는 기본 연구 예산도 사라졌다.
중견 이상 연구자나 1억원 이상 연구 사업에 대한 지원은 늘었지만, 신진 연구자에 대한 지원은 사라진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놓고 박사과정생과 박사후연구원이 성장할 수 있는 사다리가 사라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학생연구원과 박사후연구원이 내년부터 대거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젊은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 늘리겠다고 강조하지만, R&D 예산 삭감이 현실화되는 내년 상반기부터는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국가 R&D 예산 지원을 받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연구단 등이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출연연마다 사업 예산이 20% 넘게 줄었는데, 기존에 운영하던 연구실을 그대로 두는 건 불가능하다”며 “연구실을 구조조정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계약직인 학생연구원부터 줄일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런 우려 탓에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주요 이공계 대학 학생들이 R&D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석학들도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 축소에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물리학 분야의 국가 석학이기도 한 임지순 울산대 석좌교수는 최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창의적인 연구, 기초 분야에 대한 지원은 애초에 규모가 크지도 않았던 만큼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게 맞는다”며 “기초과학 분야는 인풋 대비 성과를 측정하기 힘든 만큼 너무 성과를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개발한 김진수 전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이공계 기피, 인구 감소 등 열악한 환경에서 기초과학 선진국 일본을 앞서는 성과를 거둔 한국 과학계가 내년 정부 연구비 대폭 삭감으로 큰 위기를 맞고 있다”며 “공든 탑을 쌓는데는 수십년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를 허무는 것은 한 순간”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아직까지 R&D 예산 삭감을 되돌릴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R&D 예산 삭감을 주도한 과기정통부나 이를 압박한 예산 당국 모두 공식적인 입장은 ‘정부 예산안은 국회에 제출했으니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실도 이날 “R&D 예산 증액 검토는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문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다르다. 특히 대통령실과 여당에선 과기정통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현장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무리하게 R&D 예산 삭감을 진행하다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불만이 나온다. 야당이 R&D 예산 증액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국회 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초연구와 청년 연구자에 대한 지원 예산은 되살리는 수순으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 정부 고위관계자는 “R&D 예산 삭감 과정이 일부 무리하게 진행됐다는 현장의 의견을 듣고 있다”며 “예산안은 정부의 손을 떠났지만 무리하게 삭감된 부분은 국회 논의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증액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