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에게 사료가 많이 든 접시와 적게 든 접시를 동시에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사료가 많은 접시를 선택한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실제로는 눈으로 본 물체의 수량 정보를 비교해 어떤 접시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지 판단하는 복잡한 사고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백세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물체의 수를 비교하는 동물의 능력이 학습 없이도 자연적으로 나타난다고 7일 밝혔다.
물체의 수를 비교하는 능력은 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특히 여러 종류의 물체가 섞여 있는 비율을 비교하거나 개수를 세는 능력이 동물 무리 사이의 다툼이나 사냥을 할 때 의사결정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동물이 성장하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동물행동학 연구 결과가 있으나 뇌과학적인 증거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KAIST 연구진은 뇌를 모사하는 인공신경망(ANN) 모델을 이용해 물체의 수를 확인하고 이를 비교하는 기능이 학습 없이도 발생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체 수의 비율과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도 같은 원리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학습을 하지 않은 신경망에서 두 물체 수의 비율과 차이를 구분하는 신경세포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인공신경망에 다양한 비율과 차이를 갖는 수량 정보를 제공했을 때 각 정보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신경세포가 관찰됐다. 이들 신경세포의 활동 특성을 분석한 결과, 실제 동물과 유사한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공신경망을 이용해 동물의 수량 정보 처리 방식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세포가 회로 구조를 만드는 방식은 계산신경과학 모델을 통해 검증했다. 계산신경과학은 뇌 활동을 수학적으로 분석해 신경생리, 인지 기능을 분석하는 분야다. 신경 회로는 서로 연결돼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신경세포의 집단으로 복잡한 기능을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연구진은 신경망에서 발견된 수량 비율과 차이를 구분하는 신경세포의 연결 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신경 활동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비교적 단순한 기능이 결합해 회로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실험 결과를 종합해 물체의 수량을 비교하거나 차이를 분석하는 동물의 능력이 학습 없이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분석했다. 수량을 확인하는 능력이 마치 본능처럼 타고난다는 의미다.
백 교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던 두뇌의 수량 인지·비교, 연산 기능이 초기 두뇌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발생 초기 신경망의 구조·물리적 특성으로부터 다양한 선천적 고등 인지 기능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 뇌신경과학뿐 아니라 인공지능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셀 리포트’에 지난 달 29일 소개됐다.
참고자료
Cell Reports, DOI: https://doi.org/10.1016/j.celrep.2023.11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