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초의 동물은 해면(sponge)이 아니라 빗해파리(comb jelly)로 밝혀졌다. 빗해파리는 해면과 달리 신경계를 갖고 있어 훨씬 뒤에 진화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유전자 분석을 통해 해면보다 단세포생물에 더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 역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에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어 동물의 시조(始祖)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의 대니얼 록사(Daniel S. Rokhsa) 교수와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대린 슐츠(Darrin Schultz) 박사 연구진은 18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6억년 전 공통 조상에서 먼저 갈라져 나온 것이 해면이 아니라 빗해파리라는 사실을 염섹체 유전자 집단 분석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빗해파리를 이어 해면이 등장했고 이어 공룡과 인간을 포함해 우리가 아는 모든 동물들로 갈라졌다고 주장했다.이번 연구에는 미국 몬트레이만 수족관 연구소(MBARI)와 산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 연구진도 참여했다.
◇화석 증거와 유전자 정보의 충돌
동물의 시조를 찾기 위해 과학자들은 먼저 화석을 찾았다. 가장 오래된 동물 화석은 약 5억80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1년 캐나다 연구진은 해면으로 추정되는 8억 9000만년 전 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해면은 만화영화 ‘스폰지 밥’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동물이다. 바다 밑바닥에서 무수히 많은 숨구멍으로 물을 걸러 먹이를 잡는다. 근육과 신경, 소화, 배설계가 분리돼 있지 않아 가장 오래된 동물 후보로 손색이 없다. 1990년대부터 여러 동물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도 해면이 가장 오래된 동물이라고 지목했다.
2000년대 들어 갑자기 빗해파리가 동물의 진화 단계에서 맨 위에 있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2008년 새로운 DNA 분석볍을 통해 해면이 아니라 빗해파리가 다른 모든 동물과 가장 오랜 형제라고 주장했다. 즉 빗해파리가 공동 조상에서 먼저 분리돼 별도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심해에서 섬모로 움직이는 빗해파리는 이름과 달리 해파리와는 관계가 없는 동물이다. 과학자들이 동물과 식물, 미생물에서 모두 나타나는 공통 유전자를 따져보니 빗해파리가 가장 많았다. 그만큼 빗해파리가 공통 조상에 가깝다는 말이다. 문제는 빗해파리가 해면과 달리 소화계, 운동계, 신경계를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인류의 조상을 찾았는데 돌을 든 원시인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셈이다.
◇개별 유전자 대신 집단 이동 추적
동물의 유전정보는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를 이루는 염기들이 배열된 순서로 보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DNA에 돌연변이가 생겨 염기가 다른 종류로 바뀌기도 한다. 지금까지 유전자 비교는 이런 돌연변이를 기준으로 선후 관계를 따졌다.
슐츠 박사 연구진은 그동안 유전자 비교 연구는 잘못된 해석을 했다고 주장했다. DNA의 염기는 다른 종류로 바뀌었다가 수백만년이 지나 우연히 다시 원래 염기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게다가 진화 계통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우연히 같은 형태의 돌연변이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대신 DNA가 들어있는 염색체에서 유전자들이 무리를 이뤄 다른 염색체로 이동하는 대형 돌연변이 형태를 분석했다. 마치 카드 장을 섞을 때 몇 장씩 계속 같이 움직이듯 유전자가 무리 지어 움직이는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신테니(synteny)라고 한다.
연구진은 빗해파리와 해면, 그리고 다른 동물과 단세포생물의 신테니를 조사했다. 그 결과 빗해파리는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그룹 31개 중 7개에서 단세포 생물에는 있지만, 해면과 다른 동물에는 없는 신테니 형태를 갖고 있었다. 빗해파리가 더 오래된 유전자 그룹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해면 신경계는 나중에 상실된 듯
미국 반더빌트대의 안토니스 로카스(Antonis Rokas) 교수는 이날 뉴욕타임스지에 “질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로카스 교수도 2017년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 저널에 이번과 같은 내용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가 정설로 굳어지면 해면은 원래 신경계가 있었지만 오랜 진화 과정에서 지금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초기 동물은 해면과 달리 신경계와 근육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슐츠 교수는 “신경세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1억 년 정도 더 일찍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해면은 나중에 신경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지금 보는 빗해파리를 살아있는 화석으로 볼 수는 없다. 슐츠 박사는 “살아있는 동물이 오늘날 살아있는 동물의 조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대신 빗해파리의 신경계가 다른 동물의 신경계와 얼마나 비슷한지 분석하고 있다. 신경계 진화 형태를 통해 동물의 진화를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지난 4월 노르웨이 베르겐대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표지논문으로 빗해파리의 3D(입체) 신경망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인간의 신경세포는 시냅스로 연결되는데, 빗해파리는 그와 달리 시냅스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일종의 막으로 연결돼 있었다. 연구진은 빗해파리의 신경계가 다른 동물과 독립적으로 진화했다고 결론 내렸다.
참고자료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5936-6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e5645
Nature Ecology & Evolution(2017), DOI: https://doi.org/10.1038/s41559-017-0126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2008), DOI: https://doi.org/10.1098/rstb.2015.0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