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연구진이 후성유전학적 조절로 항암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는 약물을 찾았다. 왼쪽부터 노재석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 김화련 박사 후 연구원, 정서연 연구원. /연세대

국내 연구진이 발암 유전자의 발현을 막아 암세포의 성장을 막을 수 있는 물질을 찾았다. 혈액암과 고형암 모두에서 효과를 보였고, 부작용도 적어 차세대 항암제로 개발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노재석 연세대 생화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이 후성유전학적 조절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이용해 항암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는 물질을 개발했다고 2일 밝혔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의 디옥시리보핵산(DNA) 염기 서열이 바뀌지 않고도 일어나는 유전자 발현의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다. DNA를 감고 있는 히스톤 단백질의 변형으로, DNA가 꼬여 있는 구조인 ‘염색질’이 느슨해지거나 단단히 꼬이는 현상이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후성유전학적인 변형으로 유전자 발현이 비정상적으로 이뤄지며 암이 생기거나 진행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전 세계 제약사와 연구자들이 후성유전학적 단백질을 조절하는 항암 물질을 개발하고 있는데, 이 중 유전자 발현을 촉진하는 ‘BET’ 단백질을 억제하는 약물이 가장 주목 받아 왔다. 다만 임상시험에 진입한 약물 대부분이 항암효과가 떨어지거나 부작용이 큰 것으로 나타난 만큼 새로운 약물의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연세대 연구진은 ‘DNA 암호화 라이브러리(DEL)’ 스크리닝 플랫폼을 활용해 기존 약물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BET 단백질 저해제를 만들었다. DEL 스크리닝 플랫폼은 특정 DNA 염기서열을 1조개에 달하는 약물에 동시에 붙여 증폭하고 판독하는 기술로, 기존 ‘고속 스크리닝 방식(High-throughput Screening)’ 방식보다 신약 발굴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연세대 연구진은 DEL 플랫폼을 통해 BET 단백질에 결합하는 화합물을 선별해 기존 약물보다 효과가 뛰어난 물질 ‘BBC1115′를 찾았다. 기존 물질과는 다른 화학 구조를 지닌 이 물질은 BET 단백질이 염색체의 결합을 강하게 만들어 암세포의 분화와 분열을 약 3분의 1 수준으로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또 췌장암, 대장암, 난소암 세포에서 기존 약물보다 발암 유전자로 알려진 ‘MYC’의 발현을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암에 걸린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효과가 나타났다. 췌장암, 대장암, 난소암 세포를 이식한 동물에 BBC1115를 투약하자 암세포의 성장이 50% 수준으로 느려지고, 몸무게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몸무게는 동물실험에서 부작용을 확인하는 척도로, 효과는 좋으면서 부작용은 적다는 의미다.

연세대 연구진은 실험 결과를 분석해 BBC1115가 혈액암과 고형암 모두에서 후성유전학적 치료제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후속 연구를 이어 갈 전망이다.

노재석 교수는 “암 후성유전학은 전 세계 대학과 제약회사가 주목하고 있다”이라며 “다국적 제약회사들에 국한된 후성유전적 항암 치료제가 국내에서도 개발될 계기가 되면서, BBC1115의 임상시험 진행이 속도를 낼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분자치료-핵산’에 지난달 25일 소개됐다.

참고자료

Molecular Therapy – Nucleic Acids, DOI: https://doi.org/10.1016/j.omtn.2023.04.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