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꽃가루가 꿀벌에게 먹이가 될 뿐 아니라 기생충을 잡는 구충제도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꽃가루가 소화기관에 있는 기생충은 물론, 몸에 달라붙은 진드기까지 몰아낸다는 것이다.
린 아들러(Lynn Adler) 미국 애머스트 매사추세츠대 생물학과 교수 연구진은 “해바라기 꽃가루 표면의 돌기가 뒤영벌(학명 Bombus impatiens)의 기생충을 94%까지 감소시킨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지난달 영국 생태학회가 발간하는 국제 학술지 ‘기능 생태학(Functional Ecology)’에 실렸다.
◇꽃가루 알맹이보다 껍질이 효과
뒤영벌은 꿀벌과 마찬가지로 꽃가루를 옮기는 이로운 곤충이다. 꿀벌 개체수가 급감하면서 국내 과수농가에서 꽃가루받이에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소화기관에 기생충(Crithidia bombi)이 퍼지면 여왕벌이 제대로 군집을 이루지 못한다.
연구진은 해바라기 꽃가루가 장내 기생충을 없애는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다. 뒤영벌 한 무리에게는 돌기가 있는 꽃가루 껍질만 주고 다른 무리는 알맹이만 먹였다. 세 번째 무리는 원래 꽃가루를 그대로 줬다. 꽃가루 껍질을 먹은 뒤영벌은 알맹이만 먹은 벌보다 기생충이 81% 줄었다. 원래 꽃가루를 먹은 뒤영벌은 기생충이 94%나 적었다.
해바라기 꽃가루가 기생충을 줄인다는 사실은 이전에도 알려졌지만 지금까지 연구는 꽃가루의 화학적 특성에만 집중했다. 매사추세츠대 연구진은 “기생충을 박멸한 원동력은 알맹이의 화학적 특성이 아니라 껍질의 물리적 구조였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국립 농업식품환경연구원의 세드릭 알로(Cédric Alaux) 박사는 뉴사이언티스트지에 “이번 연구는 꽃가루의 물리적 효과를 알려줌으로써 벌과의 관계를 더 강화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꽃가루의 구충 효과는 다른 식물에서도 나타난다고 밝혔다. 돼지풀과 민들레, 개회향 꽃가루 역시 해바라기처럼 돌기가 있어 뒤영벌의 장내 기생충을 77% 정도 감소시켰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하지만 꽃가루의 돌기가 어떻게 기생충을 줄이는지 정확한 원리는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꽃가루 돌기가 장벽에 붙은 기생충을 긁어내거나 찔러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꽃가루 돌기의 작용 원리와 함께 다른 벌에서도 어떤 효과가 있는지 밝힐 계획이다. 연구가 발전하면 꽃가루나 비슷한 모양의 물질을 구충제로 쓸 수 있다고 기대했다.
◇지방 빨아 먹는 진드기도 몰아내
해바리가 꽃가루는 몸 밖에서도 기생충을 몰아낸다. 아들러 교수는 미 농무부의 에반 팔머-영(Evan Palmer-Young) 박사와 함께 해바라기 꽃가루가 꿀벌의 몸에 들러붙는 바로아 응애(Varroa mite)를 몰아낸다는 사실을 밝혀내 지난 2월 국제 학술지 ‘경제 곤충학 저널(Journal of Economic Entomology)’에 발표했다.
바로아 응애는 처음 아시아 꿀벌에 기생하다가 유럽 꿀벌을 거쳐 1987년 미국에 상륙했다. 최근 사회 문제가 된 꿀벌 개체수 감소에도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드기는 보통 피를 빨지만, 바로아 응애는 체액 대신 지방을 먹는다. 꿀벌에게 지방은 사람의 간과 같다. 면역력을 유지해 겨울을 나고 살충제를 이겨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로아 응애는 꿀벌에게 치명적이다.
연구진은 바로아 응애가 극성을 부리는 늦여름에 꿀벌 무리를 나눠 각각 해바라기 꽃가루와 야생화 꽃가루, 인공 꽃가루를 먹였다. 해바라기 꽃가루를 먹은 꿀벌은 인공 꽃가루를 먹은 동료보다 바로아 응애가 2.75분의 1로 줄었다. 야생화 꽃가루를 먹은 꿀벌은 해바라기 꽃가루를 먹은 경우보다 응애가 좀 더 많았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아 응애 감염률과 해바라기 재배 면적의 상호관계를 밝힌 점이다. 연구진은 꿀벌이 사는 곳 근처에 해바라기 밭이 있으면 꿀벌이 바로아 응애에 덜 감염됐다고 설명했다. 야외 관찰 결과를 토대로 가상실험을 한 결과 양봉장에서 3㎞ 이내에 해바라기 재배 면적을 두 배로 늘리면 바로아 응애 감염률이 28%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미국에서 해바라기 재배면적이 줄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래 미국의 해바라기 재배면적은 매년 2% 감소했다. 예를 들어 다코타 주는 1980년대 소출이 나쁜 농지에 해바라기처럼 꽃이 풍부한 식물을 심어 꿀벌에게 도움을 주도록 했다. 이런 곳들이 2000년 이후 절반 이상 옥수수와 콩 재배지로 바뀌었다.
사우스 다코타와 노스 다코타 주는 미국 해바라기 재배지의 75%를 차지하며, 여름 동안 꿀벌 40%가 머무는 곳이다. 팔머-영 박사는 “해바라기가 진드기 감염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양봉장 근처에 해바라기 재배지를 늘리면 살충제를 쓰지 않고도 감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자료
Functional Ecology(2023), DOI: https://doi.org/10.1111/1365-2435.14320
Journal of Economic Entomology(2023), DOI: https://doi.org/10.1093/jee/toac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