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쥬라기공원에서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는 입을 다물어도 칼날 같은 이빨이 밖으로 드러나 공포감을 줬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그와 달랐던 것으로 밝혀졌다. 육식공룡이 입을 다물면 이빨이 입술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로버트 라이스(Robert Reisz) 교수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은 31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두 발로 걷는 수각류(獸脚類) 육식공룡이 입을 다물면 얇고 비늘이 있는 입술이 이빨을 완전히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빨이 입술에 덮여 표면 덜 닳아
과학계는 오랫동안 티라노사우루스나 벨로키랍토르(Velociraptor) 같은 수각류 육식공룡이 입술을 가졌는지 논란을 벌였다. 공룡의 후예인 새들은 입술은 물론 이빨도 없다. 공룡의 친척뻘인 악어도 입술이 없어 입을 다물면 이빨이 밖으로 나온다. 반면 도마뱀이나 뱀은 입술이 있어 이빨을 덮을 수 있다.
19세기까지는 공룡의 입술을 두고 찬반 의견이 엇갈렸지만 1980~1990년대 악어처럼 입술이 없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 결과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입술 없이 이빨이 삐져나온 공룡의 모습이 대세가 됐다. 논문 공저자인 영국 포츠머스대의 마크 위튼(Mark Witton) 박사는 “이번 연구는 영화 쥬라기 공원을 포함해 대중이 좋아하는 공룡의 묘사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그동안 공룡 연구를 종합해 크게 3가지 이유로 공룡도 입술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먼저 이빨의 겉모습에서 나온 증거다. 입술이 없는 악어는 이빨이 밖으로 노출돼 마모가 심하다. 반면 공룡 화석의 이빨을 보면 겉면의 법랑질(에나멜)이 아주 얇음에도 불구하고 마모가 심하지 않다. 평소 입술로 덮여 보호를 받았다는 의미다.
공저자인 캐나다 매니토바대의 커스틴 브링크(Kirstin Brink) 교수는 “치과의사들이 말하듯 치아 건강을 유지하는 데 침이 중요하다”며 “입술이 덮지 않았다면 이빨이 말라 먹이를 먹거나 싸울 때 손상을 입기 쉽지만 공룡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증거는 이빨의 크기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이빨은 단검만 하지만 두개골 크기에 비하면 그 비율이 오늘날 왕도마뱀과 비슷하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왕도마뱀은 입술로 이빨을 덮는다. 논문 제1 저자인 미국 오번대의 토머스 컬렌(Thomas Cullen) 교수는 “예전에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이빨이 입술로 덮기에 너무 크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그리 크지 않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마지막 증거는 턱뼈에 있는 작은 구멍들이다. 연구진은 이 구멍이 잇몸과 입 주변 조직으로 혈관과 신경이 연결되는 통로라고 추정했다. 구멍의 밀도가 낮고 일직선으로 이뤄진 형태는 악어보다 도마뱀에 가깝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융남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논문에서 수각류 공룡에 입술이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한 3가지 모두 타당성이 있다”며 “초식공룡은 뺨이 있어 식물을 입안에 두고 계속 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수각류도 입술이 있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임종덕 국립문화재연구원 자연문화재연구실장은 “공룡이 주로 악어류나 조류와 형태학적 특징이 닮았다는 연구가 많았는데 드물게 악어류와 다른 특징을 밝혀낸 연구여서 흥미롭다”며 “뼈째 씹어 먹고 사체를 토막 내면서도 공룡의 이빨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증거를 보여준 연구”라고 말했다.
◇공룡 진화, 생태 연구와 복원에 도움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화석으로 남지 않은 공룡의 부드러운 조직을 복원해 생전 생김새를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공룡이 어떻게 먹고, 치아 건강을 유지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공룡의 진화와 생태 전반을 연구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임종덕 실장은 “어린이들은 사납게 입을 벌리고 커다란 이빨을 드러낸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기대한다”며 “아쉽지만 이제 그런 희망에 부응하지 못하는 새로운 공룡의 전시물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육식공룡의 입술은 포유류처럼 근육이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고 추정했다. 대부분 파충류는 입술이 이빨을 덮을 뿐,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포유류처럼 으르렁거릴 때 입술을 위로 뒤집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밝혔다.
또 과거에 악어처럼 이빨이 밖으로 삐져나온 동물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도 아니라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이를테면 멸종한 육식 포유류인 스밀로돈은 단검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밖으로 노출돼 있었다. 또 해양 파충류나 하늘은 나는 파충류 중에도 이빨이 밖으로 길게 나온 종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주장에 반대하는 과학자도 있다. 미국 카르타고대의 고생물학자인 토마스 카(Thomas Carr) 교수는 사이언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번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연구는 단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전혀 설득력이 없다(completely unconvincing)”고 반박했다. 카 교수는 지난 2017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티라노사우루스의 턱뼈 표면이 거칠고 주름진 형태였다며 이는 입술이 없는 악어와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참고자료
Science(2023), DOI: 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bo7877
Mark Witton’s blog(2018), http://markwitton-com.blogspot.com/2018/01/did-tyrannosaurs-smile-like-crocodiles.html
Scientific Reports(2017), DOI: https://doi.org/10.1038/srep44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