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테리아가 곤충을 공격할 때 쓰는 방법을 모방해 덩치가 큰 치료 단백질을 암세포에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분자 주사기(molecular syringe)’가 개발됐다. 인체 세포와 실험동물에서 효능을 입증해 앞으로 유전자 치료와 암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하버드대 브로드연구소의 펑 장(Feng Zhang) 교수 연구진은 30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기생충의 장에 공생하는 박테리아가 곤충 세포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분자 구조를 모방해 암세포에 독소 단백질을 전달하는 분자 주사기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인공지능으로 주사기 구조 변형
알약을 먹으면 혈관을 통해 크기가 작은 약물 분자가 세포에 전달된다. 작은 분자는 세포막을 쉽게 통과하지만 그로 인해 정상 세포까지 피해를 입는 부작용이 생기기 쉽다. 치료 단백질은 병든 세포만 골라 공격하지만, 분자 크기가 훨씬 커 세포막을 바로 통과하지 못한다.
연구진은 덩치가 큰 치료 단백질을 원하는 세포에만 전달하는 방법을 기생충에 공생하는 박테리아에서 찾았다. 기생충이 곤충에 침투하면 장에 공생하는 박테리아인 ‘포토르하브두스 어심비오티카(Photorhabdus asymbiotica)’가 독소 단백질을 곤충 세포에 주입한다. 세포가 터지면 기생충이 내용물을 영양분으로 흡수한다.
MIT 연구진이 참고한 박테리아의 분자 주사기는 길이 100㎚(나노미터, 1㎚는 10억분의 1m)인 원통 구조이다. 끝에 발처럼 달린 섬유가 곤충 세포의 표면 단백질과 결합하면 마치 주사기를 누르듯 원통을 압축해 안에 든 독소 단백질을 곤충 세포에 밀어 넣는다.
이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바이러스가 박테리아에 자신의 유전자를 주입하는 방법과 흡사하다. 과학자들은 박테리아가 파지 바이러스를 흡수해 곤충 세포를 공격하는 무기로 발전시켰다고 추정한다. 10년 전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과학자들은 네이처에 요충의 장내 공생균인 포토르하브두스 박테리아가 원통 주사기로 곤충 세포에 독소를 주입하는 과정을 발표했다.
MIT 연구진은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인 알파폴드(AlphaFold)로 사람이나 동물의 세포 표면 단백질을 감지하는 섬유 구조를 설계했다. 또 전달하는 단백질에 맞는 주사기 원통 구조도 만들었다. 연구진은 새로 만든 주사기로 살아있는 생쥐와 인체 세포에 다양한 단백질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유전자 가위 치료에도 활용 기대
연구진은 주사기 끝에 암세포에만 있는 EGF(표피 성장 인자 수용체) 단백질을 감지하는 발을 달고 독소 단백질을 전달했다. 그러자 정상 세포는 그대로 두고 암세포만 죽였다. 분자 주사기기 암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유도 미사일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분자 주사기로 살아있는 생쥐의 뇌에 단백질을 전달하는 실험에도 성공했다.
유전자 치료도 기대된다. 연구진은 분자 주사기로 캐스(Cas)9 효소 단백질도 전달했다. 최근 유전자 치료법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는 특정 DNA를 찾아가 지퍼처럼 결합하는 가이드 RNA와, 결합 부위를 잘라내는 효소 단백질인 캐스9으로 구성된다. 유전자 가위가 잘라낸 부위는 정상 유전자로 대체돼 유전 질환의 근본을 치료할 방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연구진은 “이번에는 캐스9 효소만 전달했지만, 가이드 RNA까지 전달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펑 장 교수는 크리스퍼 캐스9 유전자 가위 개발진의 일원이기도 하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의 마틴 필호퍼(Martin Pilhofer) 교수는 이날 사이언스에 실린 논평 논문에서 “박테리아를 이용한 주사기는 원하는 물질을 원하는 곳에 전달하는 맞춤형 특성을 가졌다”며 “앞으로 연구와 치료 분야에서 마음대로 물질을 갈아 끼울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테리아를 모방한 주사기는 파지 바이러스를 닮았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아민 하지투(Amin Hajitou) 교수는 파지 바이러스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뉴사이언티스지에 “가망성이 있어 보이지만 질병 치료에 쓰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분자 주사기를 인체에 주입하면 면역세포가 이물질로 인식하고 공격할 수 있다. 면역반응이 일어나면 분자 주사기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치료 유전자를 전달하는 바이러스 역시 같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MIT 연구진은 “주사기 원통 끝에 미세한 단백질을 붙여 면역세포에 감지되지 않게 위장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참고자료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5870-7
Nature(2013), DOI: https://doi.org/10.1038/nature1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