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머릿수로 밀어붙일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규모가 작더라도 과학에 진정으로 흥미와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뽑아서 키워야 합니다.”
김명식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ICL) 물리학과 교수는 양자 컴퓨팅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이다. 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ICL에서 석·박사 통합 과정을 거쳤고, 이후 서강대와 영국 퀸즈대 벨파스트에서 물리학과 교수를 지내다 2010년부터 ICL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 교수는 양자물리학 연구로 2015년 영국 왕립학회에서 수여하는 울프슨상을 받았다. 2016년에는 호암상, 2022년에는 홈볼트상을 받았다. 호암상은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1990년 제정한 상으로 학술, 예술, 인류복지증진에 공헌한 인사에게 주어진다. 홈볼트상은 독일 홈볼트재단이 국제적 연구 성과를 올린 학자들에게 주는 상이다. 최근 양자 분야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도 김 교수를 직접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른 김 교수를 지난 20일 서울 중구 주한영국대사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강원도 평창 용평리조트에서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영국왕립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제6회 한·영 리서치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한국도 정부 차원에서 양자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양자 분야의 후발주자인 한국이 영국처럼 앞서 있는 국가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에게 가장 먼저 어떻게 인재를 육성해야 할 지를 물었다.
-양자뿐 아니라 과학계 전체가 인력 수급이라는 어려움을 풀지 못하고 있다.
“흔히들 과학은 어렵고 똑똑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분야라 말한다. 그래서 과학 분야에 진출해 일하는 것도 학교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받는 학생들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순히 높은 내신과 수능 점수, 화려한 스펙이 과학기술 인재의 조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건 그 학생에게 진정으로 과학에 대한 열정과 흥미가 있냐는 점이다. 시험 점수를 기준으로 몇 등에서 몇 등까지 커트라인을 정해 그 안에서 학생을 뽑는 것보다는 과학에 열과 성을 다할 준비가 된 학생을 찾아야 한다”
-그런 학생을 어디서 찾나.
“면접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ICL에서 동료 교수들과 내가 함께 만든 박사 과정 센터가 있다. 여기서 공부할 학생들을 뽑을 때 면접 과정을 거쳤는데 그 면접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일종의 압박면접처럼 어려운 문제를 계속해서 던지고 풀도록 요구한다. 그러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엉엉 울면서 틀리든 말든 끝까지 풀고 나오는 학생들이 있다. 우리가 선호하는 인재상은 후자였다. 그런 모습에서 과학에 대한 진심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어떤 교수는 전체 과목이 아니라 과학 관련 과목 학점만 보기도 한다. 또 학부 시절에 쓴 논문은 내용이나 개수도 신경 안 쓰는 교수도 있다. 학부 시절 논문 개수를 기준으로 학생을 뽑으면 박사 과정 중에도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논문 개수만 늘리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 정책 차원에서는 인재 수급을 위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2년쯤 전에 허리를 다쳐 영국에 있는 세인트조지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 의사가 직업이 뭐냐 묻길래 양자역학 교수라 하니 자기가 읽은 양자역학 책 제목을 줄줄 읊었다. 간호사도 자신이 양자역학 교수를 치료하게 됐다며 좋아했다. 영국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양자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다. 인재 수급이란 건 결국 그 분야에 몸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 게 기본이다. 양자역학이라는 분야가 국민들 개개인과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책적 홍보가 필요하다.”
-양자가 워낙 어려운 분야인 탓에 홍보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분야가 됐든 과학이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면 과학자들 역할이 중요하다. 국민들이 흥미와 관심을 갖게끔 자기 분야를 쉽고 재밌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런 설명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영국에는 브라이언 콕스 맨체스터대 물리학과 교수가 일종의 대표주자다. 적극적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서 양자역학을 설명하고 홍보한다. 한국에는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가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대중강연에 많이 나서는 걸로 안다. 이런 ‘스타 과학자’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그 부분이 부족해 보인다.”
-양자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가장 주목하는 분야가 있다면.
“아무래도 양자 컴퓨터다. 슈퍼 컴퓨터를 포함한 기존 기기들로는 할 수 없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계산들을 양자 컴퓨터는 빠르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개발은 초기 단계고 앞으로 10년은 더 있어야 상용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 현장에서 문제없이 쓸 수 있는 수준의 양자 컴퓨터가 나오면 그로 인한 변화는 상당할 것이다. 암흑물질과 같이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면서 새로운 통찰과 연구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양자기술이 연구 현장이 아닌 대중들 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가.
“물론이다. 양자기술 수준이 높아진다는 건 어떤 물질 구성을 이해하는 걸 넘어 그 물질들을 원자 수준에서부터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에 묻힌 한정된 자원을 극한 수준까지 활용해 경제성장을 훨씬 오랜 기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면 효율이나 안전성과 같은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많이 거쳐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게 양자 컴퓨터다. 양자 컴퓨터를 상용화한다면 정교한 물질 시뮬레이션을 빠른 속도로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양자 컴퓨터 실용화까지 얼마나 남았다 보는지.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최근 구글이 양자 컴퓨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를 보정하는 시스템을 내놨다. 다만 아직 완성된 건 아니다. 구글이 내놓은 시스템도 성능이 그리 높지 않은 양자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낮은 확률의 오류를 보정한 수준이다. 양자 컴퓨터는 성능이 좋아질수록 오류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에 시스템을 계속 발전시켜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