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2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뇌은행. 의료진이 포르말린에 보관중인 뇌를 정리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긴 병원 복도를 따라 앞서가던 의사가 방 앞에 멈춰섰다. 그가 지문을 찍자 자동문이 열리고 곧 시큼털털한 냄새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10평 가량 돼 보이는 공간 왼편엔 싱크대와 도마, 카메라, 모니터가 설치된 작업대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도마 위에는 수술용 가위와 칼, 쇠자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오른편에서는 녹색 앞치마를 입은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투명한 의료용 팩을 옮기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의료용 팩 안에는 검붉은 액체와 함께 몸속 장기 같은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정체를 묻자 “사람 뇌에서 떼어낸 내부 조직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좁은 공간을 따라 맨 안쪽까지 들어가자 하얀색 플라스틱 원통에 사람의 우뇌 하나가 통째로 들어있는 게 보였다. 우뇌는 세척 작업을 거친 뒤 조직이 부패하지 않도록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겨있었다.

지난 2월 22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뇌은행. 부검실 모습. /김지호 기자

◇ 전국 7개 대학병원에 설치된 연구용 뇌 보관소 ‘뇌은행’

지난달 22일 방문한 이 곳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아산생명과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뇌은행’이다. 뇌은행은 뇌연구촉진법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뇌 연구 자원 확보‧보존‧관리‧활용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설립됐다. 연구자들이 뇌 연구에 필요한 조직과 정보를 제공하는 인체 조직 은행인 셈이다.

정부는 서울아산병원과 연세세브란스병원, 가톨릭대병원, 강원대병원, 전남대병원, 충남대병원, 인제대병원 등 7곳의 권역별 협력병원뇌은행을 전국에 두고 있다. 대구에 있는 한국뇌연구원 산하의 한국뇌은행이 전국 병원에 있는 뇌은행들을 관리하고 있다. 뇌 연구 선도국인 미국에도 알츠하이머코디네이팅센터와 국립노화알츠하이머병연구센터, 유럽에선 브레인넷유럽 산하 19개 뇌은행, 호주 뇌은행네트워크 등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뇌은행이 보관하는 뇌들은 전부 사망한 사람으로부터 사전에 기증받은 것들이다. 생전에 뇌 기증 의사를 밝힌 환자가 숨지면 이후 유가족의 허락를 거쳐 받아 뇌 기증이 이뤄진다. 유가족이 허락하지 않으면 뇌 기증을 받지 못한다. 뇌은행 측은 뇌를 기증할 경우 입원했던 병원의 각종 진단비나 사망 후 장례 비용을 일부 지원하는 혜택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뇌은행은 지난 2017년부터 지금까지 2185명의 기증자로부터 뇌 조직, 혈액, 척수액 등 뇌 연구에 필요한 자원 2만4983개를 확보한 상태다. 2018년 6월부터는 연구용 뇌 자원을 전국에 있는 교육‧연구시설에 분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총 52개 연구 과제를 위해 2305개의 연구용 뇌 자원이 분양됐다.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뇌은행에 있는 육안검사대. 여기서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겨있던 뇌를 꺼내 분해 작업을 진행한다. /최정석 기자

◇ 용도에 따라 뇌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

이날 아산병원 뇌은행에서는 기증자 시신 부검과 뇌 확보, 분해, 보관, 분양이 진행됐다. 본인과 가족 동의로 뇌 기증이 최종 결정된 기증자는 사망한 뒤 병원의 부검실로 옮겨진다. 이곳에서 의사들이 뇌를 꺼낸 다음 좌뇌와 우뇌를 나눠 하나는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넣어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액체질소에 넣어 영하 200도 안팎으로 급냉시킨다.

이는 뇌 조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연구에서 이를 활용하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남수정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는 “동결된 뇌는 단백질, DNA 등 구성 요소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에 관한 연구를 하는 데 적합하다”며 “반면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넣어 고정시킨 뇌는 뇌 자체의 전반적인 구조를 연구하는 데 쓰인다”고 말했다.

이 중 포름알데히드 용액으로 고정시킨 뇌는 ‘육안검사대’로 가서 분해 작업을 진행한다. 도마 위에 뇌를 올려놓고 칼과 가위를 써서 뇌를 부위별로 잘라낸다. 육안검사대에는 연구자들의 안전을 위해 포름알데히드 용액에서 나오는 발암물질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환기 장치가 달려있다.

2023년 2월 22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뇌은행. 냉동중인 뇌 모습 /김지호 기자

◇ 분해한 뇌, 0.4마이크로미터 두께로 썰어 실험용 표본 제작

부위별로 나눈 뇌는 더 작게 자른 다음 양초 성분인 파라핀을 뇌 조각 사이사이에 침투시켜 딱딱하게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파라핀 블록’을 냉동실에 넣어 얼린 뒤 다시 꺼내 0.4마이크로미터(㎛) 두께의 얇은 막으로 만든다. 이 과정을 ‘그로스(Gross)’라 부르는 데 이렇게 해야 뇌의 특정 부위를 최대한 자세하고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다.

현장에 있던 한 아산병원 병리학과 교수는 “뇌 연구에 필요한 표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로스가 가장 중요하다”며 “그로스가 잘못되면 뇌 표본 중 일부가 잘려나가거나 연구하고자 했던 뇌 병변 부위가 소실될 수도 있기 때문에 뇌은행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로스 작업이 끝난 뇌 표본은 얇은 유리판 안에 넣어 염색을 한다. 두께가 너무 얇아서 염색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관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뇌 세포 모양과 구조를 연구할 건지 혹은 뇌 속 특정 단백질 위치를 연구할 건지에 따라 염색 방식도 달라진다.

지난 2월 22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뇌은행. 염색된 뇌 표본이 유리판 안에 들어있다. /김지호 기자

◇ 뇌 표본은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교육·연구기관으로 배송

여러 과정을 거쳐 완성한 뇌 조직 연구 표본은 아무에게나 가지 않는다. 뇌 관련 연구 과정에 뇌은행 측 표본을 쓰길 원한다면 연구 계획서를 써서 제출해야 한다. 뇌 기증 희망자가 많지 않다 보니 연구용 뇌 자원이 귀해 달라는 대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기관이 뇌 관련 연구 계획서를 한국뇌은행에 보내면 연구 필요성, 시급성과 같은 것들을 검토해 뇌 자원을 줄지 말지 결정한다. 뇌 자원을 주기로 결정하면 해당 연구기관이 원하는 뇌 자원을 갖고 있는 뇌은행 측에서 뇌 표본을 보내준다. 뇌 표본은 배송 과정에서 온도 변화로 손상이 가지 않게끔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차에 실려 연구기관으로 향한다.

성승용 샤페론 대표(서울대 의대 교수). /샤페론 제공

◇ 난치성 뇌질환 치료 연구에 활용되는 뇌은행 자원

이렇게 분양된 뇌 표본을 활용한 성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성승용 서울대 의대 교수는 지난 2020년 뇌은행으로부터 분양받은 뇌 자원을 활용해 자신이 만든 학내 벤처 샤페론의 신약 ‘누세린’이 치매를 유발하는 뇌염증을 억제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성 교수 연구팀은 뇌은행에서 정상인과 치매환자의 뇌조직을 분양받아 둘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치매환자의 뇌조직에서 면역계 세포 ‘GPCR19′가 뇌속 염증 유발 요소인 ‘P2X7R’을 만들어낸다는 걸 알아냈다. 이 상태에서 누세린을 치매환자 뇌조직에 투여하자 누세린 주성분이 GPCR19과 결합해 뇌 염증 유발 요소를 억제한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해당 연구 성과가 담긴 논문은 국제학술지 ‘프론티어스 인 이뮤놀로지’에 지난해 게재됐다.

알츠하이머 치료 부문에서도 성과가 있다. 윤승용 울산대 의대 교수는 지난 2020년과 2021년 두 번에 걸쳐 뇌 자원을 지원받았다. 이를 활용해 알츠하이머를 유발하는 변형 타우 단백질을 없애는 항체 ‘Y01′을 개발했다. 윤 교수 연구팀은 올해 상반기에 한 국제 학술지에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발표할 계획이다.

류연진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18년 첫 분양 이후 유의미한 성과가 나오고는 있지만 뇌 기증이 늘어난다면 다양한 연구들이 훨씬 더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다”며 “미국, 영국, 일본 등 해외 선진국은 30~50년 전부터 뇌은행을 운영하며 한국보다 훨씬 많은 연구용 뇌 자원을 확보한 상태”라고 말했다.

한국뇌연구원 건물.

참고자료

Frontiers in Immunology, DOI: https://doi.org/10.3389/fimmu.2022.766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