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괴물이 입안 가득 물고기를 물고 있다. 옆에 있는 범선과 비교하면 몸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북유럽의 우화(寓話)가 담긴 책에 나오는 그림이다.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손잡고 전설 속 바다 괴물이 옛사람들이 직접 목격한 고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호주 플린더스대의 해양고고학자인 존 매카시 교수 연구진은 1일 “최근 포착된 수염고래의 기이한 모습은 이미 2000년 전부터 책에 기록됐던 바다 괴물과 같았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해양 포유류 과학(Marine Mammal Science)’에 실렸다.
◇선헤엄치며 입 벌리고 물고기 유인
수염고래는 물고기 떼를 향해 돌진해 바닷물을 빨아들인다. 그 뒤 입 위에 있는 빳빳한 수염을 필터처럼 사용해 먹이를 걸러 먹는다. 대왕고래와 참고래, 혹등고래처럼 몸길이가 10~30m에 이르는 대형 고래들이 여기에 속한다.
최근 전에 보지 못한 사냥 행동이 포착됐다. 지난 2017년 일본 도쿄대 연구진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수염고래의 일종인 멸치고래(Bryde’s whale)가 태국 앞바다에서 선헤엄을 치며 입을 벌리는 행동을 관찰했다고 보고했다. 동영상을 보면 고래가 수면에서 선 채로 입을 90도로 열자 물고기들이 은신처를 찾은 듯 마구 뛰어들었다. 고래의 독특한 사냥 행동이 포착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수염고래가 서서 물고기를 유인하는 행동이 예전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최근 서식 환경이 바뀌면서 새로 생긴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플린더스대 연구진은 이번에 수염고래의 선헤엄 사냥법이 최근에 생긴 행동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았다. 사람들이 이미 2000년 전부터 목격한 행동이지만, 현대 과학이 최근에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증거는 고대 전설을 기록한 13세기 북유럽의 책들에서 나왔다. 매카시 교수는 “전설에 나오는 바다 괴물인 하프구파(hafgufa)에 대한 묘사가 최근 동영상에서 보인 고래의 선헤엄 사냥법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하프구파 또는 아스피도켈론(aspidochelone)은 아이슬란드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 괴물이다. 하프구파에 대한 첫 기록은 서기 150~200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출간된 책에 나온다. 이집트 기록은 그 전에 대서양이나 인도양에서 사람들이 목격한 경험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졌다. 알렉산드리아 기록은 300년부터 아랍어, 라틴어, 시리아어 등으로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중세 유럽까지 전달됐다. 2000년도 더 된 전설인 셈이다.
매카시 교수는 같은 대학에서 중세 문학을 연구하는 에린 세보 교수와 함께 바다 괴물이 나오는 중세 문헌들을 조사했다. 책에는 사람들이 탄 배만큼 커다란 바다 괴물이 입안 가득 물고기를 물고 있는 그림이 잇따라 나왔다. 연구진은 “책에 나오는 신화는 바다 괴물이 아니라 명백히 고래의 행동을 묘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바닷물 뿜는 모습은 향기 발산으로 묘사
바다 괴물이 수면 근처에서 입안 가득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은 18세기 책까지 이어졌다. 하프구파는 종종 거대한 문어인 크라켄(kraken), 인어와 함께 등장했다. 하프구파와 아스피도켈론은 때로는 특유의 향을 발산해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빨고래인 향고래 수컷은 향수 원료가 되는 용연향(龍涎香)을 배설하지만, 대형 고래인 수염고래는 그렇지 않다.
연구진은 대신 수염고래가 입안에 물고기를 남기고 바닷물을 수염 밖으로 뿜으면 물고기들이 더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 향을 발산한다는 묘사가 나왔다고 추정했다. 에린 세보 교수는 “이런 묘사는 현대 과학 이전에 자연환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보존된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Marine Mammal Science, DOI: https://doi.org/10.1111/mms.13009
Current biology, DOI: https://doi.org/10.1016/j.cub.2017.09.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