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팅은 우리가 제품을 만드는 모든 방식에서 혁명의 바람을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3D 프린팅은 인터넷 이후 세상을 바꿀 산업 혁명을 이끌 것이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지난 2013년 한 연설에서 3D 프린팅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미국은 3D 프린팅을 국가 핵심 기술로 정하고,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3D 프린팅 기술은 잠재력이 아닌 현실이 됐다. 일반 제조산업은 물론 건축, 설비처럼 거대한 크기를 가진 분야에서도 3D 프린팅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3D 프린팅으로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디스플레이나 센서처럼 나노 단위의 미세 공정이 필요한 첨단 전자제품 제조에서도 3D 프린팅이 쓰이고 있다. 무엇이든 크게 만드는 것보다 작게 만드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나노 단위의 미세 공정에 3D 프린팅을 쓰기 위해서는 나노미터(㎚) 수준의 미세한 출력을 할 수 있는 잉크와 프린터가 있어야 한다. 아직까지 기술적인 장벽이 높아 국내외에서 실제로 나노 단위의 3D 프린팅에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어려운 기술에 도전하고 있는 곳이 있다. 봄이면 군항제가 열리는 진해항에서 멀지 않은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 자리한 한국전기연구원 본원의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이 바로 그 주역이다.

한국전기연구원(KERI)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은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스마트 콘텍트 렌즈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이병철 기자

한국전기연구원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다양한 소재로 출력 할 수 있는 3D프린터를 만들고 있다. 설승권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 책임연구원은 “‘왜 3D프린터로는 미세한 공정을 구현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며 “궁극적으로는 별도의 회로 기판 없이 제품의 뼈대에 직접 디스플레이, 안테나, 센서 등을 구현하는 스트럭처럴 일렉트로닉스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라고 소개했다.

일반적인 전자제품은 기능을 결정하는 인쇄회로기판(PCB)에 소자와 회로를 그려 넣고, 외부에 뼈대를 넣어 모양을 만든다. 그러나 외부 구조에 3D 프린터로 직접 회로를 그려 넣으면 구조 자체만으로 필요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전자제품을 스트럭처럴 일렉트로닉스라고 부른다. 옷이나 피부에 붙이는 전자장치인 웨어러블 장치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스트럭처럴 일렉트로닉스를 구현하려면 평평한 PCB가 아닌 굴곡이 있는 제품의 표면에 미세한 회로를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또 회로를 그릴 수 있는 재료도 제한돼 있어 기존 제품보다 성능을 높이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설 책임연구원은 “스트럭처럴 일렉트로닉스를 구현하려면 재료, 장치, 소프트웨어처럼 제조업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통합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며 “우리도 모든 기술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트럭처럴 일렉트로닉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금까지 구현하지 못했던 기능을 손쉽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프리시던스리서치에 따르면 2021년 국제 3D 프린티드 일렉트로닉스 산업 규모는 106억달러(약 13조7206억원)에서 2030년까지 매년 15% 성장해 382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이 개발한 70㎚급 3D 프린팅 결과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상도로, 발광이나 전기전도도 특성이 유지돼 스마트 전자제품을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다. /KERI

현재 국내 스마트 3D프린팅 기술은 세계 상위권 수준이다. 가장 확실한 성과는 출력 해상도다.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은 2020년 70㎚ 수준의 해상도를 낼 수 있는 3D프린터를 직접 개발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상도를 가진 3D프린터다. 설 책임연구원은 “머리카락의 1만 분의 1의 굵기이지만, 단순히 가는 것이 아니라 빛을 내거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다양한 기능을 가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표재연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 선임연구원이 개발한 퀀텀닷 디스플레이가 고해상도 3D프린터를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양자점을 활용한 퀀텀닷은 수명이 길고 색상 재현률이 좋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고 있지만, 해상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퀀텀닷(양자점) 소자 하나의 크기를 줄여야 하는데, 이 경우 밝기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표 선임연구원은 3D프린터로 퀀텀닷 소자를 쌓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표 선임연구원은 “3D프린터를 활용해 퀀텀닷 디스플레이의 밝기는 유지하면서 해상도를 높이는 방법을 찾았다”며 “이외에도 종이 위에 회로를 그려 기판으로 쓰거나 미세 구조로 색을 만드는 기술로 확장해 기존에 없었던 전자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이 개발한 스마트 콘텍트 렌즈의 작동 영상. 3D 프린팅으로 콘텍트 렌즈에 안테나와 디스플레이를 그려 넣어 사용자가 직접 네비게이션 화면을 볼 수 있게 했다. /KERI

최근에는 스트럭처럴 일렉트로닉스를 구현하는 데도 성공했다. 연구팀은 콘텍트 렌즈에 위성항법장치(GPS) 신호를 받을 수 있는 안테나와 디스플레이를 그려 넣어 사용자가 눈에 끼우기만 해도 내비게이션을 볼 수 있는 스마트 콘텍트 렌즈를 지난 6일 공개하기도 했다. 별도의 PCB기판 없이도 복잡한 기능을 콘텍트 렌즈에 그려 넣은 회로만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로봇팔을 이용해 형태에 관계 없이 표면에 인쇄가 가능한 3D프린터, 은·그래핀·탄소나노튜브·산화철처럼 다양한 인쇄 잉크를 개발하고 있다. 산업적으로도 기술의 가치를 인정받아 3건의 기술 이전을 마쳤다. 3D프린터를 개발하는 업체와 PCB 제조업체, 체외진단기기 업체가 기술 이전을 받아갔다.

설 책임연구원은 “앞으로 의료바이오 분야에서 3D프린팅 기술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외에도 로봇, 항공우주 분야에서 3D프린터의 쓰임새가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스마트 3D프린팅 연구팀이 개발 중인 3D프린터. 인쇄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불량률을 낮출 수 있다. /이병철 기자

3D를 넘어서 4D프린팅을 구현하는 프린터도 만들고 있다. 4D프린팅은 외부에서 자극을 줬을 때 형태와 특성이 바뀔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가령 외부에서 자기장을 걸었을 때 자성이 바뀌는 자석을 만들면 극에 따라서 서로 붙었다 떨어지는 원리로 소프트 로봇, 나노 로봇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설 책임연구원은 “사실 현재 수준에서 전통적인 제조 공정을 3D프린터로 대체하기는 어렵다”며 “다만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통해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제품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산업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