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155㎜ 구경 견인포가 배치돼 있다. 전쟁에 쓰이는 포탄과 미사일 같은 군사 무기에 사용된 중금속은 세균의 변이를 유발해 항생제 내성을 갖게 한다. /AFP=연합뉴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시작된 전쟁으로 현재까지 양측에서 민간인과 군인 등 24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전쟁이 멈춘다면 전쟁에 따른 인명 피해가 사라질까. 병리학 전문가들의 답은 ‘아니오’다. 총과 미사일로 죽는 사람은 없겠지만, 전쟁을 겪으며 내성 능력이 생긴 세균으로 숨지는 사람은 계속 나올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최근 공개됐다.

안토니 아부 파야드 레바논 베이루트 아메리칸대 교수 연구진은 14일 국제학술지 ‘브리티시메디컬저널 글로벌헬스’에 “이라크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다제내성 세균의 발생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군사 장비에 들어간 중금속이 세균 변이 유발

이라크는 최근 50년간 5번의 전쟁을 겪었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시작으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1년 걸프전,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2014년 이라크 내전까지 겪으면서 수백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보건의료 단체들은 이 기간 항생제 내성균의 출현도 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2018년 이라크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의 40%가 다제내성균에 감염될 만큼 내성균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다제내성균은 여러 종류의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세균이다.

항생제 내성 황색포도상구균의 현미경 사진.

파야드 교수 연구진은 전쟁과 항생제 내성균의 출현 사이의 관계를 찾기 위해 이라크가 겪은 5번의 전쟁 사례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이라크가 겪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숨진 2003년 미국의 침공, 2014년 이라크 내전에서 사망자의 90%가 다제내성균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제내성균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과 관계 없더라도 사망자 대부분이 수술을 받았거나 상처가 난 적이 있는 만큼 전쟁으로 감염과 전파가 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균이 전쟁 과정에서 항생제 내성을 얻는 이유도 밝혀졌다. 일반적으로는 세균은 항생제의 오·남용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세균이 변이를 거치면서 항생제 내성을 얻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쟁에서 세균이 항생제 내성을 얻을 때는 총알, 미사일, 탱크 같은 군사 무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군사 무기에는 생명체에 독성을 일으키는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s), 중금속이 사용되는데, 하천으로 흘러 간 독성 물질이 세균의 변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주거지를 잃은 사람들이 대피 시설에 모여 살며 비위생적인 환경, 부상자들의 잦은 수술로 인한 환자 간 전파도 주요한 원인으로 꼽혔다.

파야드 교수는 “현대 전쟁은 독성 중금속과 항생제 사용을 모두 늘려 세균이 빠르게 변이를 일으키는 환경을 만든다”며 “결국 항생제 내성균이 늘고, 보건 인프라가 파괴돼 전쟁 이후에도 세균 감염으로 인한 보건 안보 위기가 이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한 약국에서 항생제 아목시실린 알약을 만들고 있다. 유럽은 현재 항생제 내성균 검출 사례가 늘면서 항생제 부족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항생제 내성균 늘어

전쟁이 세균의 항생제 내성을 키운다는 경고는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에 침공을 시작하자, 유럽 질병예방통제센터(ECPDC)는 전쟁으로 다제내성균이 늘어날 것을 우려하는 입장을 냈다. ECPDC는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 병원에서 치료 받은 사람들은 다제내성균 감염 검사를 위해 격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독일에서는 2017~2021년 2건에 불과했던 카바페넴 내성 폐렴막대균의 검출이 지난해 3월 이후 68건으로 크게 늘었다. 카바페넴은 대장균, 살모넬라균, 콜레라균을 포함하는 그람음성균에 쓸 수 있는 마지막 항생제로, ‘인류 최후의 항생제’라고 불리고 있다.

독일 그람음성균 다제내성에 대한 국가기준센터(NRC) 연구진은 지난해 12월 국제 학술지 ‘유럽 감시’에 독일의 항생제 내성균 증가 이유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독일에서 지난해 발견된 카바페넴 내성균 환자의 32%는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해온 사람”이라고 밝혔다. 유전체 분석으로 독일에서 발견된 항생제 내성균이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것도 확인했다.

국제 학술지 ‘랜싯 감염병’에 2018년 소개된 논문에서도 전쟁을 피해 살던 지역을 탈출한 난민의 항생제 내성균 검출률은 25.4%로, 다른 이유로 망명을 신청한 난민의 내성균 검출률 6.6%에 비해 4배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로라 정 독일 라이프치히대병원 연구원은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면서 전쟁 지역의 항생제 내성균이 독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며 “전쟁으로 늘어나는 항생제 내성균은 그 지역만이 아닌 전 세계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항생제 오·남용과 전쟁으로 내성균은 계속 늘고 있지만, 항생제 개발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최근 10년 동안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새롭게 허가 받은 항생제는 6종에 불과하다. 새로운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는다면 2050년까지 1000만명의 사람이 매년 항생제 내성균 감염으로 숨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전쟁이 항생제 내성균을 늘리며 전 세계 보건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국제사회가 항생제 개발과 함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마틴 피쳇 존슨앤드존슨 글로벌 보건 책임자는 지난해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글로벌 보건 정상회의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촉구하면서 “우리는 모두가 안전해질 때까지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BMJ Global Health, DOI : https://doi.org/10.1136/bmjgh-2022-010863

Lancet Public Health, DOI : https://doi.org/10.1016/S2468-2667(17)30099-3

Lancet Infectious Diseases, DOI : https://doi.org/10.1016/S1473-3099(18)30219-6

Eurosurveillance, DOI : https://doi.org/10.2807/1560-7917.ES.2022.27.50.220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