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어도 독립하지 않고 여전히 부모에게 얹혀사는 캥거루족(族)이 늘고 있다. 어미의 배 주머니에서 사는 다 큰 캥거루 새끼를 빗댄 말이다. 바다에도 캥거루족이 있다.
영국 엑시터대의 마이클 와이스 교수 연구진은 9일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태평양에 사는 범고래(학명 Orcinus orca) 어미는 다 큰 아들을 챙기느라 새로 자식을 낳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다 큰 아들 돌보려 출산도 포기
범고래 어미는 15~18개월 임신 기간을 거쳐 새끼를 낳고 2년 동안 돌본다. 하지만 미국 워싱턴주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연안에 사는 범고래 무리는 임신한 어미 중 출산까지 성공한 경우가 3분의 1에 그쳤다. 새로 태어난 새끼도 첫해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인은 무리 속의 다 큰 수컷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수컷이 다 큰 뒤에도 어미 근처에 있으며, 어미도 여전히 다 큰 수컷을 보살피는 모습을 관찰했다. 와이스 교수는 이와 같은 장기 육아가 범고래 어미의 생식 성공률에 영향을 미친다고 추정했다.
연구진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1982년부터 2021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서쪽 연안에 사는 범고래 무리에서 암컷 40마리를 추적했다. 출생 후 최소 첫해까지 살아남은 새끼는 54마리였다. 연구진은 어미가 낳은 새끼의 성별이 다음번 출생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컴퓨터 모델로 분석했다.
놀랍게도 수컷을 보살피는 어미는 암컷을 낳은 어미나 아직 출산을 하지 않은 암컷보다 매년 새로 새끼를 가질 가능성이 50% 이상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 큰 아들이 동생들이 태어날 기회를 차단한 셈이다. 수컷이 암컷보다 젖을 더 많이 먹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컷은 젖을 떼고 다 자란 뒤에도 어미 보살핌을 받았다.
어미가 다 큰 아들을 계속 양육하는 것은 사냥 때문이었다. 와이스 교수는 “범고래 수컷은 덩치가 워낙 커 먹잇감인 왕연어를 잡기에 동작이 민첩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어미가 힘들게 잡아 먹여줘야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어미의 내리 사랑은 암컷 자식에게는 가지 않았다. 연구진은 범고래 어미가 자신의 유전자를 더 잘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수컷은 무리를 떠나 다른 곳에서 새끼를 낳지만, 암컷은 같은 무리에 머문다. 범고래 어미로서는 아들을 보살피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손자를 키울 걱정을 안 해도 되지만, 딸은 같은 무리에서 손자를 낳아 자원을 두고 다퉈야 한다.
이는 어미가 딸을 통해 유전자를 퍼뜨리려면 더 큰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와이스 교수는 “가능한 아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진화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며 “이번 발견은 일생 여러 번 새끼를 낳을 수 있는 동물에서 어미가 평생 같은 새끼에게 투자하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사례”라고 밝혔다.
◇손자 키우려 인간처럼 폐경 맞아
그렇다고 딸이 섭섭할 필요는 없다. 범고래 어미는 같은 무리에서 딸이 낳은 자손을 보살피기 위해 일찍 할머니가 된다. 대부분 동물에서 암컷은 죽기 직전까지 새끼를 낳는다. 수명이 한참 남았는데도 생식 능력이 사라지는 폐경(閉經)을 맞는 현상은 포유류 중 사람과 범고래·들쇠고래 단 세 종에서만 발견된다. 범고래 암컷은 12~40세에 새끼를 낳고 폐경을 겪는다. 그 후에도 90세 이상 산다.
과학자들은 인간과 범고래의 조기 폐경은 노산(老産)의 위험을 감당하기보다 손자를 잘 보살펴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더 많이 퍼뜨리도록 진화한 결과로 해석한다. 자손을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이른바 ‘할머니 가설’이다.
영국 셰필드대 연구진은 2004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18~19세기 캐나다·핀란드 여성 3000여명을 조사한 결과, 여성은 폐경 이후 10년마다 평균적으로 2명의 손자를 더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할머니가 오래 산 가족은 자식이 더 빨리 결혼했으며 손자의 터울도 짧았다. 손자들이 탈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비율도 높았다. 할머니가 있어야 집안이 번성한다는 말이다.
범고래도 마찬가지다. 북미 고래연구센터의 자문과학자인 영국 엑시터대 다렌 크로포트 교수는 수십 년간 범고래 무리를 촬영한 영상을 분석해 할머니 가설을 입증했다. 2012년 사이언스 발표 논문에 따르면 폐경이 지난 암컷이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끈 경우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보다 32% 많았다. 다 자란 수컷보다는 57%나 많았다. 만약 나이 든 암컷이 없으면 30세 이상 수컷의 사망률이 14배나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자료
Current Biology, DOI: https://doi.org/10.1016/j.cub.2022.12.057
Science, DOI: https://doi.org/10.1126/science.1224198
Nature, DOI: https://doi.org/10.1038/nature02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