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 귀엽고 온순하다 해서 만지거나 먹이를 주는 식으로 접근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변이가 사슴의 몸속에 남아 있다가 인간에게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코넬대 수의과대학 소속인 디에고 디엘 교수 연구팀은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현재 유행이 지난 코로나19 알파·감마 변이가 흰꼬리 사슴의 몸속에서 진화하며 다른 흰꼬리 사슴들에게 전파됐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지난 2020년과 2021년 9~12월 사이 뉴욕주에서 사냥꾼들이 잡은 사슴의 조직 샘플 5500개를 가져와 분석했다. 그 결과 코로나19 알파·감마 변이가 다른 변이에 밀려 유행이 끝난 이후에도 흰꼬리 사슴의 몸속에 남아 전파와 진화를 거듭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2020년 9~12월에 채취한 조직 샘플 중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발견된 건 0.6%(2700개 중 17개) 뿐이었다. 이듬해인 2021년 9~12월에 채취한 조직 샘플은 21%(2762개 중 583개)가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가장 많이 발견된 변이는 알파 변이었고 그 뒤를 감마, 델타가 이었다.
연구팀이 2021년에 흰꼬리 사슴 샘플을 채취했을 당시 뉴욕주에는 델타 변이가 유행하고 있었고 알파·감마 변이 유행 추세는 한풀 꺾여 있었다. 특히 샘플 채취가 주로 이뤄진 뉴욕 외곽 지역은 알파·감마 변이 비중이 훨씬 낮았다. 델타 변이 유행 이전에 흰꼬리 사슴들이 알파·감마 변이에 집단 감염됐고 이후에도 바이러스가 계속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디엘 교수는 “흰꼬리 사슴은 북미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개체수가 많아 인간과도 오랜 기간 자주 접촉해 왔다”며 “이들이 몸속에 코로나19 변이를 품고 있으면 일종의 ‘야생 바이러스 저수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흰꼬리 사슴이 전염성, 치명률이 강해진 코로나19 알파·감마 변이를 인간 사회에 전파시키는 숙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연구는 이전에도 있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수의학및생물의학과 소속 수레시 쿠치푸디 교수 연구팀은 지난 2021년 11월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에 사는 흰꼬리 사슴이 인간과 접촉하며 코로나19에 감염된 뒤 야생에서 이를 전파시켰다”고 했다.
쿠치푸디 교수 연구팀이 2020년 4월부터 2021년 1월까지 미국 아이오와주에 서식 중인 살아있는 사슴 샘플 283개를 분석한 결과 94개(33.2%) 샘플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쿠치푸디 교수는 “야생 흰꼬리 사슴이 인간이 직접 주거나 버린 음식물을 먹는 식으로 코로나19에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에 걸린 사슴 무리가 인간에 어느 정도 위협이 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사람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사람으로 옮는 인수공통감염병인 만큼 주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코로나19에 감염된 박쥐가 인간에게 병을 옮기면서 시작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DOI: https://doi.org/10.1073/pnas.2215067120, https://doi.org/10.1073/pnas.2121644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