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RI가 기술이전 업체와 관련해 홈페이지 올린 공지문. /ETRI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기술을 이전 받은 뒤 다단계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은 회사가 불법 유사수신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과학기술계에선 성과 채우기에 급급한 출연연이 기술이전 기업 관리를 소홀히 하면서 언제든 터질 수 있었던 일이라는 반응이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기술이전과 관련된 법과 규정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6일 과학기술계와 국회에 따르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워너비그룹에 대한 기술이전 과정을 놓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감사를 받고 있다. 워너비 그룹은 자회사인 워너비ETR을 통해 지난해 ETRI에서 블록체인 관련 기술을 이전 받았다.

문제는 워너비그룹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해 워너비ETR이 마치 ETRI의 연구소기업인 것처럼 투자자를 모은 것이다. 워너비그룹은 출연연과 공동사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투자자를 모았는데, 이 과정에서 불법 유사수신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ETRI의 고발과 금융감독원의 수사의뢰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관련기사 2023년 1월 18일자 ‘[단독] “출연연과 공동사업” 투자자 모은 업체… ‘유사수신’ 혐의로 경찰, 수사 착수’)

과기계에선 ETRI 역시 기술이전 사후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에 따르면, ETRI는 워너비ETR에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하면서 기술이전신청서, 상용화 계획서의 주요 내용을 빈칸으로 남겨두고 업체에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실 관계자는 “ETRI가 업체에 기술을 이전하면서 제대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관련 서류도 미비해 과기부에 감사를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ETRI 관계자는 “현재 감사에 성실히 임하고 있고, 기술 이전 과정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과기계에선 기술이전 제도 자체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법에 따르면 출연연이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할 때 비정상적인 사업을 하는 업체를 걸러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출연연의 기술 이전은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 촉진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이뤄지는데, 이 법에 따르면 출연연은 기술 개발에 투자한 업체를 제외하면 모든 업체에게 균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관계자는 “출연연의 기술 이전은 자체 연구가 어려운 중소기업의 기술 확보를 위해 많은 업체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취지”라며 “그 일례로 동시에 여러 기업이 기술을 함께 이전 받을 수 있도록 비독점적인 통상실시권을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업체에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제출받은 서류가 미비하더라도 기술 이전을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 출연연 관계자는 “기술 이전을 검토하기 위한 위원회도 열리지만, 이는 이전료를 산정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며 “만약 이 과정에서 일부 업체를 제외하고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하면 해당 업체의 항의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과기계는 이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기술 이전 사업에서 이전 건수, 기술료 수입처럼 수치적인 성과를 평가하는 대신 제도 개선과 내실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출연연 관계자는 “기술 이전 방법과 관련해 법에 있는 ‘균등한 기회’를 제외하면 그 어떤 지침도 없어 출연연 자체적으로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며 “많은 수의 중소기업에게 기술을 확보해준다는 긍정적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더 세심한 규정이 마련돼 비정상 업체를 걸러낼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비슷한 사고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