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란 영화가 있었다. 영화처럼 산에 살던 늑대가 바다에 정착했다. 먹잇감인 사슴이 사라지자 바다의 해달로 식성을 바꾼 것이다.
미국 오리건 주립대의 탈 레비 교수와 오리건주 어류야생동물보호국의 그레첸 로플러 박사 연구진은 24일 국제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알래스카의 한 섬에 사는 늑대 무리가 먹잇감인 사슴이 사라지자 2년만에 식성을 해달로 완전히 바꾼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늑대가 해달이나 물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하지만 주된 먹잇감을 해달로 삼은 것은 이번에 처음 확인됐다. 레비 교수는 “주로 바다에서 생활하는 해달이 육지에 사는 육식동물의 주된 먹이가 된 첫 사례”라며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라고 말했다.
◇사슴 사라지자 해달로 대체
연구진은 알래스카 남동부의 플레젠트 섬에서 늑대 무리를 관찰했다. 2013년 늑대 두 마리가 처음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왔다. 연구진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이 늑대들의 후예를 추적, 관찰했다. 늑대 목에 위치추적기를 달고 배설물에 섞인 뼈와 털을 분석했다.
2015년 배설물의 DNA를 분석했더니 늑대가 잡은 먹이의 4분의 3은 사슴이었고, 나머지는 해달이었다. 하지만 늑대가 섬을 휩쓸면서 사슴 개체수는 급감했다. 2017년이 되자 섬에 사는 늑대는 13마리로 늘었고 사슴은 반대로 2015년 개체수의 7%로 급감했다. 사슴 수는 2020년까지도 회복되지 않았다.
먹이가 사라지면 늑대도 파국을 맞기 마련이다. 1960년 알래스카 남쪽 코로네이션 섬에 살던 늑대들은 사슴이 사라지자 대신 잔점박이물범을 사냥했지만 먹이 부족으로 결국 동료끼리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늑대는 8년 만에 단 한 마리만 남아 군집이 붕괴되는 운명을 맞았다.
놀랍게도 플레젠트 섬의 늑대는 달랐다. 2015년 늑대 배설물에서 나온 DNA는 사슴이 75%였지만, 2017년이 되자 그 수치가 7%로 급감했다. 대신 해달이 60%를 차지했다. 해달은 인간의 남획으로 알래스카 대부분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보호, 복원 노력으로 개체수가 늘었다.
레비 교수는 “해달 복원으로 게임의 판도가 바뀌면서 바다 늑대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2020년 배설물 조사 결과, 늑대 먹이의 57%가 해달이었고 사슴 흔적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머지는 물고기와 다른 바다 생물이 차지했다.
◇해달 위한 사냥 전력도 발전
미국 지질조자국의 레인 애덤스 박사는 사이언스에 “지금까지 늑대는 사슴처럼 발굽달린 동물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했다”며 “이번 결과는 한 포식자가 다른 생태계에 있는 다른 포식자를 주요 먹이로 삼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늑대는 해달로 식성을 바꾸면서 새로운 사냥 전략도 발전시켰다. 해달은 귀여운 외모지만 바다에서는 강력한 발톱과 이빨 덕분에 늑대도 쉽게 덤비지 못한다. 대신 바위 투성이 해변에서는 잘 움직이지 못해 늑대에게 쉬운 먹잇감이 된다. 연구진은 늑대들이 해변으로 올라온 해달을 앞뒤로 막아 바다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면서 사냥을 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늑대가 해달을 먹잇감으로 삼은 곳은 플레젠트 섬만이 아니다. 지구온난화로 알래스카 해안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달이 인근 해변으로 자주 올라가고 늑대와의 조우도 늘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진은 늑대가 해달을 사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오래전 이 지역에서 두 종이 서로 먹이사슬에 포함됐던 것이 다시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레비 교수는 “해달 복원이 예전부터 있었던 바다와 육지의 상호작용도 되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참고자료
PNAS, DOI: https://doi.org/10.1073/pnas.2209037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