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700년 무렵 상아로 만든 머리빗. 당시 가나안 지역에서 쓰이던 문자로 '이 엄니가 머리카락과 수염의 머릿니를 박멸하길 바란다'란 뜻의 글이 새겨져 있다./이스라엘 히브리대

청동기 시대이던 3700년 전 최초의 알파벳(alphabet) 문장이 새겨진 머리빗이 발굴됐다. 학계는 그림문자에서 소리문자가 진화한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의 요세프 가핑겔 교수 연구진은 “이스라엘 라기스 국립공원에서 상아(象牙)로 만든 기원전 1700년의 머리빗을 발굴했다”고 지난 9일 국제 학술지 ‘예루살렘 고고학 저널’에 밝혔다.

머릿니 박멸을 기원하는 문장 새겨

머리빗에는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쓰이던 문자로 ‘이 엄니가 머리카락과 수염의 머릿니를 뿌리뽑길 바란다(May this tusk root out the lice of the hair and the beard)’란 뜻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연구진은 문자 하나하나가 자음이나 모음을 나타내는 음소문자(音素文字), 즉 알파벳 문장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음소문자는 기원전 1800년 무렵 지금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가나안 지역에서 쓰이다가 이후 전 세계로 퍼졌다고 추정된다. 지금까지 고대 가나안 문자 한두 개가 기록된 유물이 발굴됐지만, 이번처럼 완전한 문장은 처음 나왔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기원전 1700년 머리빗에 새겨진 글자들.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쓰이던 문자로 '이 엄니가 머리카락과 수염의 머릿니를 박멸하길 바란다'란 뜻의 글이 새겨져 있다./이스라엘 히브리대

머리빗은 코끼리 엄니인 상아로 만들었다. 크기는 가로 3.4센티미터(㎝), 세로 2.5㎝이고 양쪽에 이가 나 있다. 한쪽에는 굵은 이가 6개 있고, 반대쪽에는 가는 이가 14개 있다. 굵은 이는 모두 부러져 없지만 가는 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연구진은 굵은 이로는 엉킨 머리칼을 풀고, 가는 이는 머리카락과 수염에 있는 머릿니를 제거하는 데 썼다고 추정했다.

상아 머리빗은 2017년에 발굴됐다. 하지만 글자는 올 초 처음 확인됐다. 히브리대의 기생충학자인 매들린 뭄추글루 박사는 고대 머릿니를 찾기 위해 현미경으로 빗의 이 사이를 관찰했다. 머릿니는 다른 곤충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성충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번데기 상태가 없이 불완전변태를 한다. 뭄추글루 박사는 단단한 키틴질로 된 0.5~0.6밀리미터(㎜) 크기의 어린 머릿니 머리를 확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뭄추글루 박사는 현미경 관찰 후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빗 전체를 찍었다. 사진을 확대해보니 비로소 표면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그는 바로 벤구리온대의 고문서학자에게 사진을 보냈다. 이후 5년간 다른 고대 문자와 일일이 비교하는 해독 작업 끝에 마침내 17개 단어로 머리빗의 용도를 알려준 문장이 드러났다.

고대 문자의 진화과정 규명에 도움

머리빗이 발굴된 라기스는 기원전 2000~1001년 가나안의 주요 도시였으며, 이후 다윗 왕조가 다스린 남(南) 유다왕국에서도 중요한 도시였다고 알려졌다. 이곳은 가나안 문자 유물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다. 지금까지 라기스에서 가나안 문자가 새겨진 유물 10점이 발굴됐다.

기원전 1700년에 만든 상아 머리빗이 발굴된 이스라엘 라기스 유적지./이스라엘 히브리대

인류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2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처음 발달했다. 당시 문자는 소리대로 쓰는 알파벳, 즉 음소문자가 아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추상적인 기호나 그림 수백 개로 사물과 의미를 표시했다. 그러다 보니 익히는 데 몇 년씩 걸렸다.

학계는 첫 음소문자는 오늘날 아랍어, 히브리어와 같은 셈어(語)를 쓰던 사람들이 기원전 1800년 무렵 발명했다고 본다. 이들은 이집트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이어서 처음엔 상형문자의 특징을 보였지만 나중에 글자 수십 개만 섞어 문장을 쓸 수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 음소문자는 마치 인쇄기술이나 인터넷처럼 인류의 의사소통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원시 가나안 문자로 알려진 최초의 음소문자는 오늘날 지중해 동부 연안의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을 아우르는 레반트 지역에서 쓰이다가, 기원전 1100년 무렵 고대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이 표준화했다. 이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썼고, 글자의 형태와 자세도 표준화했다. 페니키아 문자는 히브리어와 고대 시리아의 아람어를 거쳐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자의 토대가 됐다. 이후 오늘날 유럽에서 쓰는 다양한 문자들로 발전했다.

가핑겔 교수는 “최초의 알파벳이 남긴 DNA는 오늘날 영어와 히브리어에도 남아있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영어 알파벳의 첫 글자 A는 소가 두 다리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형태란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h)도 같은 형태인데, 이는 셈어로 소를 의미한다.

기원전 1700년 상아 빗의 이 사이에 남은 어린 머릿니의 흔적./이스라엘 히브리대

연구진은 이번 상아 빗이 고대 문자의 진화 과정뿐아니라, 고대인의 생활상도 알려준다고 밝혔다. 고대인은 아무리 귀족이라도 머릿니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의미다.

가핑겔 교수는 “머리빗에 새겨진 문장은 매우 인간적”이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라기스에서 나온 유물 중 물건의 용도를 알려주는 글이 있는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고대 머리빗은 나무나 뼈, 상아로 만들었다. 이 중 상아는 매우 비싼 재료여서 귀족들만 쓸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이 지역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아 머리빗은 근처 이집트에서 왔을 것이라고 연구진은 추정했다.

참고자료

Jerusalem Journal of Archaeology, DOI: https://doi.org/10.52486/01.00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