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마추어 일러스트레이터가 'AI 그림 수정해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손 스케치.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사는 권모(23)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길 희망해 6년간 직접 그린 캐릭터를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SNS)에 올려 왔다. 실력이 늘자 그에게 소정의 금액을 주고 자신이 주문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하는 의뢰도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권씨는 최근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를 포기했다. 캐릭터 그림을 SNS에 올리는 것도 멈췄다. 캐릭터 일러스트에 특화된 인공지능(AI) 화가 ‘노벨 AI’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노벨 AI는 사용자가 입력한 명령어와 간단한 밑그림을 기반으로 1분 만에 높은 수준의 캐릭터 일러스트를 여러 장 그려낸다. 권씨는 “인간이 아무리 실력을 갈고 닦아도 그 속도와 품질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신 권씨는 노벨 AI가 아직 인간의 손발은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점을 자신에 유리하게 이용해보기로 했다. SNS에 인간의 손과 발만 그려서 홍보하기 시작했다. AI가 그린 그림에 손과 발을 추가하는 대신, 캐릭터 전신을 그려주고 받는 돈의 5분의 1 가격만 받기로 했다.

권씨는 “6년간 그림을 연습한 게 아까워 소소한 용돈 벌이라도 할 겸 업종을 바꾼 셈”이라며 “AI 화가가 고도로 발전할수록 경력이 애매한 아마추어들은 점점 나와 비슷한 선택을 할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용자가 입력한 명령어에 맞춰 그림을 그려주는 AI 화가 프로그램은 최근 잇따라 등장했다. 미드저니(Midjourney), 달리2(DALL-E-2) 같은 프로그램이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 기업인 구글도 지난 5월 자체 개발한 AI 화가 ‘이매젠(Imagen)’을 발표했다. 심층학습AI에 수억에서 수십억개에 달하는 인터넷 이미지를 학습시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사용자들이 명령어를 입력하면 이에 해당하는 이미지들을 AI가 뒤섞은 다음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한다.

노벨 AI 이미지 제너레이터 공식 홈페이지.

노벨 AI의 정식 명칭은 ‘노벨 AI 이미지 제너레이터’다. 원래는 소설을 써주는 딥러닝 AI이지만 개발자들이 그 기능을 이미지 생성 분야에 활용하는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해 올해 10월 완성했다. 독일 뮌헨대와 하이델베르크대 연구진이 개발한 이미지 생성 AI인 ‘스테이블 디퓨전’을 기반으로 개발됐다. 월간 구독 형태로 가격대는 한화 1만4000원에서 3만5000원 사이다.

그동안 AI화가들은 사용자가 원하는 화풍까지 그림에 세세하게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노벨 AI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AI가 특정 작가의 화풍까지 따라하도록 명령어에 ‘작가 키워드’를 넣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작가 키워드에는 반 고흐, 피카소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뿐만 아니라 권씨와 같은 아마추어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닉네임도 넣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권씨가 트위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작가 키워드에 넣고 나머지 명령어를 입력하면 노벨 AI가 권씨 그림을 모조리 분석해 화풍을 학습한다. 이렇게 하면 마치 권씨가 직접 그린 것처럼 화풍이 똑같은 결과물이 1분 만에 나온다. 굳이 권씨에게 돈을 주고 커미션 의뢰를 맡길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AI 화가 프로그램 '미드저니(Midjourney)'에 명령어 'hands(손)'을 입력했을 때 나온 결과물. /최정석 기자

이제 막 출시한 지 한 달을 넘긴 노벨 AI는 미술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한 네이버 인기웹툰의 채색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관계자는 “이전에 나온 AI 화가 프로그램과는 달리 노벨 AI는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실질적인 ‘생계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러스트레이터의 화풍은 이들이 돈을 받고 자기 그림을 파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세일즈 포인트”라며 “노벨 AI가 나오면서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비싼 돈을 주고 그림을 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미국 인기 만화 시리즈인 ‘마블 코믹스’를 연재하며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김락희 만화 작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AI의 실력은 이미 프로 수준”이라며 “결과물을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라고 평가했다.

다만 노벨AI를 비롯해 현재 모든 AI 화가 프로그램은 인간의 손발을 정확히 묘사하지 못한다. 이는 AI 화가가 인간의 손가락, 발가락이 5개라는 점을 학습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들이 학습하는 그림들 중에는 각도상 손가락, 발가락이 5개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그림을 학습하다 보니 얼굴, 몸, 팔, 다리 등 전반적인 인체비는 정확한 반면 손가락과 발가락은 비정상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김 작가는 “수년간 그림을 그려온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들에게는 이런 AI의 등장이 매우 절망적일 것”이라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AI보다는 잘 그려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인기 만화가인 주호민 작가가 노벨 AI에 자신의 대표작인 '신과 함께' 표지를 입력한 결과물을 보고 있다. /유튜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