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할아버지가 약국을 하던 1960년대엔 자전거를 타고 약이 필요한 사람에게 배달했습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라 아무런 의료 인프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약회사도 우주에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김정균 보령 이사회 의장은 25일 제주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개막한 아시아 미세중력학회에 참석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우주 과학자들에게 우주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김 의장이 말한 할아버지는 보령제약 창업주 김승호 회장이다.
여섯 살 된 아들과 네 살배기 딸을 두고 있는 김 의장은 2018년 아이들에게 우주와 관련된 영상을 보여 주려고 찾다가 우연히 스페이스X의 재활용 발사체 팰컨9의 1단 로켓 2기가 동시에 땅에 착지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자신이 우주 사업에 나설 결심하게 한 방아쇠가 됐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이 현실이 아닌 컴퓨터 그래픽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하지만 곧 머지 않아 더 많은 사람이 우주로 갈 기회를 얻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이날 한국과 일본, 중국, 인도에서 우주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회사의 우주사업 추진 현황을 소개하며 관심을 당부했다. 마이크로 중력학은 무중력에 가까운 우주 환경에서 나타나는 물리 화학적 현상과 우주인의 신체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보령은 지난 3월 우주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류에게 꼭 필요한 회사가 되기 위해 우주라는 공간을 선택했다”며 “우주라는 새롭게 열리는 기회의 공간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3월 보령제약에서 보령으로 사명도 바꿨다.
보통의 국내 제약사들이 신약을 개발하고 복제약을 생산하는 사업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생 벤처도 아닌 창업한지 반세기가 넘는 전통 제약사의 이런 발표에 투자자나 국내 업계도 깜짝 놀랐다. 해외에서도 제약사가 본격적으로 우주산업에 뛰어든 사례는 아직 없다.
보령의 새 성장 동력을 이끄는 중심엔 오너 3세의 젊은 기업인인 김 의장이 있다. 김 의장은 보령제약그룹 창업주인 김승호 회장의 손자이자 보령홀딩스 김은선 회장의 아들이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하고 중앙대에서 약학을 공부한 뒤 삼정KPMG를 거쳐 2014년 보령제약 입사했다. 2019년부터 보령홀딩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지난 3월 주총에서 사명을 개정한 보령의 사내 등기이사로 선임되며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 의장은 이제 막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다른 제약사 3~4세들과 달리 우주라는, 국내는 물론 해외 제약사들도 아직 서먹해 하는 낯선 영역으로 관심을 돌렸다. ISS와 달, 화성으로 더 많은 인간이 이주할 시대를 앞두고 미세중력과 우주방사선 등 우주 환경에 노출된 인체의 변화를 파악하고 인체에 생기는 문제들의 해결점을 찾아 사업화하겠다는 구상이다.
김 의장은 이날 2019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산하 존슨우주센터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존슨우주센터는 아폴로11호를 비롯한 미국의 유인 우주 비행을 담당하는 곳이다. 김 의장은 존슨 우주센터의 미션컨트롤센터를 비롯해 주요 시설을 돌아보며 전·현직 우주비행사들과 나눴다. 김 의장은 우연히 옆에 있던 NASA 고위 관계자에게 “우주에 사람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시원찮았다. “누구도 알 수 없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 의장은 이때 이 분야가 인류에겐 매우 중요한 영역일 될 수 있다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본격적인 우주 사업에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준비에 들어간 건 2020년이다. 김 의장은 2021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우주산업포럼인 코리아스페이스포럼에 보령홀딩스 대표 자격으로 발표자가 아닌 청중으로 조용히 참가에 눈길을 끌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우주 헬스케어 사업을 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전이다.
회사 직원들에게 회사가 우주에서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지구로 보내온 한 장의 이미지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점점 많은 사람이 우주에 진출하는 시대가 됐는데 헬스케어와 제약 산업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먼저 우주 헬스케어 산업을 키울 꿈나무 기업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김 의장은 “호기심과 영감이 더 많은 사람을 우주로 이끌고 있는데 이제는 사람을 우주에 안전하게 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며 “우주에서 인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보령은 지난 4월 ‘제1회 케어 인 스페이스(Care In Space CIS) 챌린지’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우주사업 진출을 알렸다. 미국의 우주개발 전문기업 액시엄 스페이스와 글로벌 항공우주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스타버스트가 공동 파트너사로 참여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산하 우주보건중개연구소(TRISH) 제임스 휴리 부국장, 액시엄 스페이스의 스미스 존스턴 CMO(최고미디어책임자)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스페이스 헬스케어 전문가들이 심사를 맡았다.
CIS는 장기간 우주에서 생활하는 우주인들의 건강 관리와 의료 시장을 겨냥한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다. 본격적인 우주 시대의 인류 건강에 ‘없어선 안 될 기여자’가 되고 사업의 새로운 성장 기회를 찾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챌린지에는 정밀의학과 정신건강, 우주 제약, 재생의학, 원격진료 등 우주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헬스케어 영역에 걸쳐 60개 팀이 지원했다. 지난 8월 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 콘퍼런스홀에서 열린 발표 대회에는 8개국 16개 팀이 참여해 아이디어를 뽐냈다. 현재 여기서 선발된 어드밴시스 텔레센서와 딥스페이스바이올로지, 마이엘린H, 나노파마솔루션, 비보헬스, 엑스토리 등 6개 스타트업과 기업이 사업화 과정인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인공지능(AI)과 확장현실(XR)과 같은 기술을 우주 환경에 적용하는 방안부터 우주인 건강 예측, 우주 제약 같은 우주인 건강 관리와 직결된 아이디어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들 기업은 10만 달러의 지분 투자와 함께 항공우주 전문 액셀러레이터 스타버스트의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미국 우주기업 액시엄스페이스의 멘토링을 받는 기회를 받았다.
김 의장은 “우주에서 인간의 건강과 관련된 문제들을 찾아내 해결하려면 가능한 한 많은 파트너를 모아 그 중 가장 뛰어난 회사를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약 생산 중심의 보령이 우주라는 낯선 사업 분야를 새 먹거리로 선택한 배경엔 안정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만년 10위권이라는 상황을 타개할 돌파 전략이 필요해서란 평가가 있다. 또 NASA도 우주개발 예산의 30%를 우주의학과 우주 의약품 제조에 투자할 정도로 이 분야가 유망해서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주 산업의 확대를 추진하는 스타버스트와 액시엄 스페이스도 보령의 이 부분을 잘 파고 들었다.
실제로 김 의장은 이날 액시엄스페이스의 개발 현장을 가본 경험을 소개하며 이와 같은 모범 사례 기업들과 협력하게 된 점을 좋은 기회라고 평가했다. 또 보령이 추구하는 이상과도 일치한다고 했다.
김 의장은 매년 새로운 사업 모델과 아이디어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현재 발굴된 스타트업에 투자할 초기 투자 기업들과 지구 저궤도(LEO)에서 기술 테스트를 수행할 여러 파트너 기업들과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의장은 NASA 홈페이지에 공개된 유인 우주개발 계획인 아르테미스 프로그램을 보여주며 “달과 화성에 사람을 보내는 프로그램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며 “기업들이 뛰어들 수 있고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기업들이 우주에 가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있고 또 이것이 우주로 나가는 이유”라며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