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생물다양성연구소의 줄리 사르도스 박사가 직접 딴 야생 바나나 조상 품종. 과육이 작고 씨가 많아 먹기 어렵게 돼있다. /줄리 사르도스 박사 제공

과학자들이 치명적인 곰팡이병으로 멸종 위기에 내몰린 바나나를 사수하기 위해 ‘바나나의 조상’ 찾기에 나섰다. 인간의 눈에 아직 띄지 않은 야생 바나나 품종을 찾아 현재 먹기 위해 재배하는 바나나와 교배시켜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탈리아 생물다양성연구소 줄리 사르도스 연구원 연구진은 야생에 사는 바나나 65종과 식용 바나나 154종에서 유전자(DNA) 샘플을 추출해 비교한 결과 일부 품종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야생 바나나 조상 품종 3종의 유전자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약 20년간 전 세계를 돌며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바나나 품종들을 찾고 있다. 이번 분석에 모두 219종의 품종을 사용했는데 이 중 25종은 직접 파푸아뉴기니에서 가져온 샘플이다. 바나나가 어떤 유전적 진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추적해 병충해에 강한 유전자를 찾기 위해서다.

오랜 기간 야생에서 살아남은 바나나의 조상을 찾아 현재 식용으로 활용되는 바나나와 교배한 다음 전염병과 바이러스에도 잘 견디는 유전자를 가진 바나나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2019년 호주 퀸즐랜드 공대 제임스 데일 교수 연구진은 생명력이 강한 야생 바나나와 식용 바나나 유전자를 편집해 키운 결과 오랜 기간 병충해에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야생에서 강인하게 살아남은 바나나와 식용 바나나의 유전자를 섞는 방식이 효과가 있다는 의미다.

지난 9월 30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바나나들. /연합뉴스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세계 바나나 시장 규모는 2020년 80억 달러(11조5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바나나는 매년 전 세계에서 1억2000만t이 생산되는데, 이는 전체 과일 가운데 가장 많은 생산량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식용 바나나의 95%가 캐번디시 품종이 차지한다. 상품 수확, 포장, 운송 등 여러 면에서 한 품종만 재배하는 게 비용이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이런 독점적 지위는 만에 하나 치명적인 질병이 발생하면 멸종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캐번디시가 바나나 시장을 지배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캐번디시의 조상은 처음에는 크기가 작고 씨앗이 많아 먹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바나나 나무에서 자라는 꽃과 뿌리를 캐서 먹었다. 시간이 흘러 바나나 조상이 다른 품종, 과일과 유전적으로 서로 섞이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현재 식용 바나나처럼 과육에 씨가 없는 돌연변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위가 캐번디시 바나나, 아래가 그로미셸 바나나. /유튜브 캡처

캐번디시 바나나보다 먼저 시장을 독점한 건 ‘그로미셸’이라는 품종이다. 과육이 짧고 굵으며 휘어있지 않은 이 바나나는 캐번디시보다 맛이 좋았다. 하지만 질병에 약하고 강풍이 불면 잘 부러져 수율이 좋지 않았다.

결국 1950년대부터 중남미를 시작으로 전 세계 바나나 농장에 ‘바나나 암’이라 불리는 파나마병이 퍼지며 대량 생산이 어려워졌다. 파나마병은 푸사륨(Fusarium)으로 불리는 곰팡이가 물과 흙을 통해 바나나 나무를 뿌리부터 감염시키는 전염병이다. 바나나 나무에 파나마병이 퍼지면 바나나가 시들고 감염된 나무 주변 토지가 수십 년 간 오염된 상태로 남는다.

바나나 시장은 병충해에 상대적으로 강한 캐번디시 품종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캐번디시 품종 역시 1989년 대만에 창궐한 파나마병이 확산하면서 바나나 말라죽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1997년 호주에서는 새로운 곰팡이 균주인 ‘TR4′가 등장했다. 이 곰팡이는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등을 거쳐 2019년에는 콜롬비아, 페루를 비롯한 남미 대륙까지 확산했다. 베트남 식물자원센터가 올해 2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TR4는 25년 안에 베트남 바나나 산지 71%를 없앨 정도로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학자들은 품종 교배 이외에도 바나나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찾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줄리안 하버드 교수팀은 바나나와 같은 외떡잎식물을 접목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접목은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량이 높은 작물을 만드는 전통적 농업 기술인데, 지금까지는 쌍떡잎식물만 가능하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하버드 교수팀이 외떡입식물 씨앗에서 채취한 배아 조직을 활용해 접목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생긴 셈이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서 새로운 사실도 알아냈다. 인간이 먹기 위해 최초로 재배한 바나나는 인도와 호주에서 유래한 야생 바나나 조상 품종인 ‘무사 아쿠미나타’의 후손 ‘뱅크시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식물학 전문 저널 ‘프론티어스 인 플랜트 사이언스(Frontiers in Plant Science)’에 논문으로 실렸다.

지난 30년간 전 세계 바나나 경작지에 치명적인 곰팡이병이 퍼졌다. 붉은색은 곰팡이병 발생지역이고 노란색은 바나나 주요 생산지역, 녹색은 바나나 주요 수입지역이다. /미주농업협력연구소

참고자료

Plant Biotechnology Journal, DOI : https://doi.org/10.1111/j.1467-7652.2011.00639.x

MycoKeys, DOI : 10.3897/mycokeys.87.72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