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땅 밑 1000m 지하로 출근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아파트로 치면 300층이 넘는 깊이다. 과학자들이 일터까지 가려면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587m 깊이까지 내려가야 한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롯데월드타워(555m)보다도 32m나 더 긴 거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온 다음에도 한 번 더 카트를 타야 한다. 그렇게 카트를 타고 4분가량 더 달리면 마침내 지하 1000m에 과학자들의 실험공간이 나타난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지난 2013년 처음 연구단을 꾸린 후 이렇게 지하에 실제 실험실을 구축하기까지 꼬박 9년이 걸렸다. 땅을 파고, 연구 시설을 갖추는데 100억원이 넘게 들어갔다. 미국, 캐나다, 일본은 일찌감치 이런 지하 실험시설을 짓고 여기서 나온 성과로 노벨상까지 수상했다. 한국 과학자들이 스스로 컴컴한 어둡고 습한 깊은 지하를 택한 이유다.
5일 강원도 정선군 예미산 지하 1000m에 국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 실험연구소 ‘예미랩’이 문을 열었다. 지난달 29일 개소를 1주일 앞두고 지하 실험연구소 예미랩을 찾았다.
◇지하 1000m에 지은 연구시설…2013년 연구단 출범 후 9년만에 ‘완성’
아침 7시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3시간을 달려 예미산 자락에 있는 예미랩 지상 시설에 도착했다. 지하 실험실을 지원하고 연구자들의 간이 쉼터로 활용되는 지상연구소는 옛 함백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리모델링한 건물로 이날도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예미산의 지역명과 영어로 연구실을 뜻하는 랩을 합쳐 이름 붙인 예미랩은 IBS가 강원도 정선군, 한덕철광과 협약을 맺고 지하 1000m에 지은 암흑물질 연구 시설이다. 예미랩 구축 사업은 2016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승인으로 본격화했다. 2020년 8월 예미랩 1단계 터널 공사를 완공하고 임시 운영을 시작했다. 공사는 예미랩이 들어선 국내 유일의 철광석 생산기지인 한덕철광이 맡았다. 현장 건설 책임자를 맡은 박강순 IBS 책임기술원은 한덕철광이 공사를 맡은 이유를 묻자 “현재 법령에 따르면 광산 내 개발은 광업권자만 할 수 있어 한덕철광이 과거 인수한 대림종합건설이 사업을 맡았다”고 말했다.
올해 9월 주요 실험 공간이 조성됐고 현재는 차세대 대용량 검출기와 전기 공사 등 인프라 구축을 마친 상태다. IBS는 이달부터는 연말까지 모든 실험 장비 설치를 마치고 내년부터는 본격 실험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이재승 IBS 지하 실험연구단 연구위원은 “지하 연구시설을 설치할 후보지로 여러 곳이 고려됐다”면서 “터널 공사만 3년을 했는데 단 한 건의 인재 사고 없이 마무리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또 “지하 실험연구단이 설립됐을 때 처음 제안된 시설이 9년 만에 완성돼서 뿌듯하다”고 했다.
지상연구소에서 예미랩으로 출발하기 전 간단한 안전교육을 받았다. 안전모, 안전화와 같은 안전장비를 막상 받아보니 온몸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하 깊숙이 있는 실험실에 입성하려면 철광석이 수북이 쌓인 한덕철광 야적장을 지나야 한다. 지상연구소에서 2.3㎞ 떨어진 예미랩 입구까지는 차를 타고 5분가량 소요된다. 지하로 가는 입구까지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울퉁불퉁한 길을 차로 달리자 광산 한복판 언덕 위에 번지점프대처럼 생긴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차를 타고 가던 IBS 관계자가 “여기부터가 연구소”라고 귀띔했다.
구조물은 케이지로 불리는 광산용 엘리베이터다. 국산 기술이 없어 독일 업체 제품을 쓰고 있다. 해발 550m에서 케이지를타고 총 587m 밑으로 수직하강했다. 5명까지 탑승하는 이 엘리베이터는 초당 4m로 내려가는데, 바닥까지 내려가는데 걸리는 소요 시간은 3분3초가 걸렸다.
지하 깊은 곳은 춥고 습기가 높을 것 같았지만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지하에 도착해 1분여를 걸었을까. 이미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 땅속 기온은 계절과 관계없이 26~28도 온도를 유지한다는 게 이곳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의 설명이다.
비교적 지반이 튼튼한 지역에 지었지만 지하 실험실 벽은 15㎝ 두께로 콘크리트를 발랐다. 갱도 안 천장과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콘크리트엔 장기간 견고함을 유지하도록 모래, 섬유질, 철사 등을 섞었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골프 카트를 개조한 차량을 타고 실험실이 있는 지역까지 더 내려가다 보면 여러 공간이 눈에 띈다. 마치 지하에 조성된 작은 도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빈 공간은 곧 국내외 다양한 연구 기관들이 들어와 공동 연구를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기상청이 가장 먼저 터를 잡았고, 경북대, 국가수리과학연구소도 입주 신청을 마쳤다. 이 연구위원은 “예미랩은 다양한 기관에 항상 오픈할 계획이며 지금도 입주를 요청하는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상 1000m 아래로 내려간 이유…“우주 탄생 비밀 푼다”
그렇다면 이렇게 깊고 컴컴하고 답답한 지하 1000m에서 대체 무슨 연구를 진행하는 것일까. 김영덕 IBS 지하실험연구단장은 “다른 물질과 반응하지 않은 ‘중성미자’의 성질을 규명하고,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 물질인 암흑물질 탐색 실험을 한다”고 말했다.
우주는 138억년 전 빅뱅(big bang·대폭발)을 통해 탄생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은 스스로 빛을 내는 수많은 별을 다 합쳐도 우주 전체의 5%밖에 안 된다고 설명한다. 과학자들은 중력이 있지만 빛을 내지 않는 존재, 즉 암흑물질이 우주의 27%를 차지한다고 본다. 나머지는 중력 대신 밀어내는 척력을 가진 암흑에너지로 추정된다. 미국과 유럽 등은 30여년 전부터 이 가운데 암흑물질 연구를 시작했지만 아직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과학자들이 2015년 지하 실험실에서 다른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는 ‘중성미자’를 발견해 노벨상을 받았다.
우주를 설명하는 표준모형은 12가지 기본입자로 구성된다. 중성미자는 표준모형에서 물질을 구성하는 12개의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단위인 기본 입자 중 하나다. 현 인류가 인지하고 있는 중성미자는 전자중성미자·타우중성미자·뮤온중성미자 3종류지만, 과학자들은 또 다른 종류의 중성미자가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현재 인지한 3종류의 중성미자의 질량 차이만을 알고 있으며, 정확한 질량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IBS는 예미랩에서 중성미자 성질 규명 실험과 암흑물질 가운데 유력 후보인 윔프(WIMP)를 검출하는 실험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윔프는 다른 물질과 거의 반응을 하지 않으면서 중력을 가질 만큼 무거운 입자라는 말이다. 핵심은 이 윔프 입자를 검출해내는 것이다.각각 ‘아모레(AMoRE)’와 ‘코사인(COSINE)’으로 부르는 실험이다.
그렇다면 중성미자 성질을 알아내고 암흑물질을 감지하기 위해 이처럼 지하 1000m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상보다 연구 환경이 좋기 때문이다. 지하로 깊이 내려갈수록 잡음이 되는 다른 우주입자나 배경 방사능(우주선)을 최대한 걸러낼 수 있다. 산 자체가 일종의 거름막이 되어주는 셈이다.
우주 입자들은 1000m 아래로 오면서 땅속 입자들과 반응해 대부분 사라진다. IBS관계자는 “배경 방사능이 지표면과 비교해 100만분의 1로 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실험에서 불필요한 잡음 대부분을 차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실험의 성패는 방해 요소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에 달렸다.
기초과학 선진국인 미국과 캐나다, 일본, 이탈리아, 중국은 일찌감치 땅 깊숙한 곳에 실험시설을 구축했다. 중국은 우리 지하 실험시설보다 2배 이상 깊은 2400m에 실험장치를 마련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1만8000㎡로 최대 면적을 갖췄다. 예미랩은 세계에서 6번째 규모이다.
◇세계 각국에 ‘노벨상’ 안겨준 지하실험실…예미랩, 美 MIT·NASA ‘러브콜’
암흑물질과 중성미자는 노벨물리학상 ‘0순위’ 후보로 거론된다. 그만큼 연구 가치가 크다는 의미다. 지하실험실은 이미 노벨상 산실로 불린다.
일본은 1958년 기후현 가미오카 광산 지하 1000m에 중성미자 관측 장치인 ‘가미오칸데’를 설치하고 1996년까지 운영했다. 이후 한층 더 향상한 ‘슈퍼 가미오칸데’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두 연구시설을 통해 일본은 2002년과 2015년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미국(샌포드 지하 연구시설)과 캐나다(서드베리 중성미자 관측소) 역시 각각 2번씩 노벨 물리학상을 안았다.
국내 과학계도 양양에 지하 700m 실험실에 이어 지하 1000m 실험실이 마련되면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규모는 세계 6위지만, 세계 어느 지하실험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환경이 조성됐다는 평가다. 실제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IBS에 암흑물질 연구와 별개로 케이지 시설을 이용해 자유낙하 시 생명체에 대한 반응을 연구하고 싶다며 협력 요청을 해왔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연구 협력도 논의되고 있다. 이재승 연구위원은 “MIT는 가속기 기술을 보유하고, 우리는 검출기 기술에서 두각을 보인다”며 “양측이 협력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지름 20m, 깊이 24m에 이르는 공간에 대형 액체섬광물질 검출기(Liquid Scintillator Counter·LSC)를 들여올 예정이다. 이는 태양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이다. 바로 옆에는 가속기가 설치된다. 가속기와 검출기 거리가 가까울수록 목표로 한 중성미자를 찾을 확률이 올라간다.
본 게임은 내년부터다. 답을 찾을 확률은 희박하다. 그런데도 우리 과학자들은 지하 1000m 아래서 구슬땀을 흘린다.
이 연구위원은 “실험에 실패할 확률이 100%지만 내년부터 2024년까지 계속해서 실험 규모를 키워나갈 계획”이라며 “한계를 계속해서 그을 수 있어 의미가 크고 분명 다음 실험의 토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