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치고 있는 혹등고래. 고래는 꼬리를 아래위로 움직여 헤엄친다. 이때 꼬리에서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뇌가 손상되기 쉽다. 고래는 혈관 그물로 피를 우회시켜 혈압 변화에 대처한다./위키미디어

TV드라마에서 우영우 변호사가 사랑하던 고래는 몸집이 큰 만큼 늘 질병에 노출돼 있다. 엄청난 덩치가 헤엄치면 갑자기 피가 꼬리에서 머리로 몰리면서 고혈압으로 뇌 손상을 입기 쉽다. 또 몸집이 크면 세포도 많아 그만큼 암 발병 위험도 크다. 하지만 고래는 바다에서 장수 동물로 유명하다. 고래는 어떻게 고혈압과 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학자들이 고래의 신체 방어 수단을 잇달아 찾아냈다.

뇌 손상 막는 그물 혈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동물학과의 로버트 새드윅 교수 연구진은 지난 23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고래의 혈관 그물이 헤엄치는 도중 혈압이 높아져 뇌가 손상되는 것을 막아낸다”라고 밝혔다.

고래는 크든 작든 모두 꼬리를 아래위로 움직여 헤엄친다. 이렇게 하면 꼬리에서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엄청난 압력이 발생한다. 갑자기 혈압이 높아지면 뇌가 손상을 입기 쉽다. 육지 동물 역시 빠른 속도로 달리면 같은 처지에 놓이지만 고래와 달리 숨을 쉬어 혈압을 낮출 수 있다.

고래는 두개골과 척추, 흉부에 혈관 그물(rete)이 있어 헤엄칠 때 꼬리에서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을 우회시킬 수 있다. 덕분에 고혈압으로 뇌가 손상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Science

연구진은 고래가 헤엄을 치는 동안 뇌 손상을 입지 않는 것은 혈관에 있는 보호 장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600년대 깊은 바다에 사는 고래에서 놀라운 그물이란 뜻을 가진 ‘레티아 미라빌리아(retia mirabilia)’라는 혈관 그물 조직이 발견됐다. 새드윅 교수 연구진은 혈관 그물이 혈압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추정했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먼저 남방큰돌고래에서 대왕고래까지 고래류 11종의 신체 특성을 토대로 헤엄칠 때 혈압이 어떻게 변하는지 가상 실험으로 확인했다. 실험 결과 혈관 그물은 동맥에서 뇌로 밀어닥치는 혈압을 주변 정맥으로 우회시켜 꼬리의 힘이나 이로 인한 맥압의 강도를 줄이지 않고 혈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혈관 그물은 고래의 흉부와 척추, 두개골에 분포하고 있다. 새드윅 교수는 “가상 실험은 고래가 헤엄칠 때 맥압이 초래하는 피해를 혈관 그물이 90% 이상 감소시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밝혔다.

이번 가상 실험은 바다표범이나 바다사자는 고래처럼 혈관 그물이 없는지도 설명해준다. 연구진은 이들은 고래와 달리 몸을 좌우로 흔들어 이동하기 때문에 뇌로 혈압이 몰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북극고래는 다른 고래보다 특정 유전자가 더 많아 세포 분열 속도가 느린 것으로 밝혀졌다. 덕분에 DNA 손상을 수리할 시간이 많아 암에 덜 걸리는 것으로 추정된다./NOAA

손상된 세포 수리할 시간 늘린 유전자

고래는 수명이 길기로 유명하다. 몸무게 90톤이 넘는 북극고래는 200년이 넘는다. 포경선에 잡힌 한 수컷은 나이가 무려 211년이었다. 과학자들은 유전자로 따져보면 실제 수명은 268년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 버팔로대의 빈센트 린치 교수 연구진은 북극고래는 다른 고래보다 특정 유전자 수가 더 많아 오래 살 수 있다고 밝혔다. 대신 수컷의 생식 능력은 떨어지는 희생이 따랐다. 이번 연구 결과는 동료 과학자의 심사를 받기 전 지난 7일 논문 사전출판 사이트인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먼저 공개됐다.

몸집이 크면 세포도 많아 그만큼 암에 걸릴 위험도 커진다. 하지만 덩치가 큰 고래나 코끼리는 오래 산다. 197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의 리처드 페토 박사는 동물원이나 자연에서 죽은 코끼리를 부검해 암으로 죽은 경우가 5% 미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몸무게가 코끼리의 70분의 1에 불과한 인간은 그 비율이 11~25%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페토의 역설’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고래는 다른 동물보다 DNA가 조금만 손상돼도 바로 세포가 죽게 함으로써 암이 발생할 여지를 없앤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북극고래는 여기에 또 다른 무기까지 갖췄다. 린치 교수 연구진은 북극고래는 세포분열을 천천히 해서 손상된 부분을 바로 잡을 시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이 찾아낸 무기는 CDKN2C이란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이다. 북극고래는 500만년 전 긴수염고래와 진화과정에서 갈라진 직후, CDKN2C 복제본을 다시 DNA에 추가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다른 고래보다 CDKN2C 단백질을 더 많이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 동물실험에서 CDKN2C 단백질을 세포 분열을 늦추는 것으로 밝혀졌다. 린치 교수는 북극고래는 CDKN2C 유전자가 더 많아 세포가 두 배로 증식하기까지 다른 고래보다 15시간이 더 걸리는 것을 확인했다. 세포가 분열할 때 DNA 손상이 일어나기 쉽다. 분열이 느리게 진행되면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찾아내 고칠 시간도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북극고래는 암을 막는 대신 생식 능력이 감소했다. CDKN2C 유전자는 정자를 만든느 세포의 수와 고환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에도 관여한다. 북극고래의 고환은 무게가 200㎏ 정도로 비슷한 몸집의 긴수염고래가 1000㎏인 것에 비하면 매우 작다. 받은 만큼 내놓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