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가 여성 생식기에서 난자를 찾아가는 여행은 한 치 양보도 없는 무한 경쟁의 질주가 아니라 서로를 밀어주는 사회적 협동 과정으로 밝혀졌다.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농업기술주립대의 치-쿠안 퉁 교수 연구진은 지난 23일 국제 학술지 ‘첨단 세포발생생물학’에 “여성 생식기의 3차원 구조를 모방한 실험을 통해 소의 정자들이 2~4개체가 무리 지어 체액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생식기 입체 구조 모방한 실험장치
네덜란드의 박물학자인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1678년 현미경으로 처음 인간의 정자를 관찰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정자의 운동은 수억 개체가 동시에 하나의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로 여겨졌다.
퉁 교수는 지금까지 현미경 관찰 방법의 한계 때문에 정자의 운동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현미경으로 정자를 볼 때는 344년 전 처음 한 것처럼 물을 묻힌 유리판 사이에 정액을 압착한다. 쿤 교수는 이런 평면 환경은 실제 여성 생식기의 3차원 입체 공간을 헤엄치는 정자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입체 공간을 가진 실리콘 미세관의 한쪽에 주사기로 여성 생식기에서 분비되는 체액처럼 점도가 높은 액체를 주입했다. 소의 자궁경부나 자궁 내부의 체액처럼 치즈가 녹은 정도의 점도를 구현했다. 반대편으로는 사람 정자와 모양과 운동 형태가 비슷한 소의 정자 약 1억 개체를 넣었다. 관찰 결과 정자들은 둘에서 넷 정도 개체가 무리를 지어 마주 흘러오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거슬러 헤엄쳤다.
◇체액에 휩쓸리지 않게 서로 도와
퉁 교수는 “모든 실험 조건에서 한 개체가 앞으로 나와 이끌기보다 각 개체들이 무리를 이뤘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군집 안에서 위치도 바꿨다”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번 실험에서 세 가지 다른 조건에서 군집 이동이 도움을 주는 것을 확인했다.
먼저 액체가 흐르지 않을 때 군집은 개별 정자보다 더 똑바로 헤엄칠 수 있었다. 그만큼 더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중간 정도 유속일 때도 무리를 지으면 더 똑바로 헤엄쳤으며, 혼자 가는 정자는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유속이 빠를 때 혼자 움직이면 금방 액체에 휩쓸려 뒤로 밀려나지만, 무리를 지으면 계속 거슬러 헤엄칠 수 있었다.
연구진은 정자들의 군집 이동은 사이클 선수들이 공기 저항을 덜 받기 위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펠로톤(Peloton)’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퉁 교수는 “군집 이동은 정자 중 일부만이라도 난자가 있는 나팔관까지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라며 “무리를 짓지 않으면 어떤 개체도 자궁에 흐르는 체액의 강한 유속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자들의 다양한 군집 형태 확인
정자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동물은 소 외에도 있다. 2002년 영국 셰필드대 연구진은 ‘네이처’에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에 사는 북숲쥐의 정자들이 머리에 달린 고리로 수백, 수천 개체씩 기차처럼 연결돼 이동한다고 발표했다.
연체동물 중에는 한 정자가 다른 개체보다 훨씬 큰 경우가 있다. 프랑스와 체코 연구진은 2018년 유럽 굴에서 다른 개체보다 훨씬 큰 정자가 다른 정자를 생식기 내부로 이동하는 버스 역할을 한다고 발표했다. 2016년 미국 툴레인대 연구진은 주머니쥐의 정자가 비대칭인 머리를 서로 연결하고 쌍으로 헤엄친다고 발표했다. 정자들은 난자 가까이 간 뒤에야 떨어졌다.
이처럼 여러 동물에서 정자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현상이 관찰됐지만 어떤 이득을 얻는지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앞으로 불임 원인을 밝히는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자의 군집 이동을 기준으로 생식 능력을 판정하는 식이다. 또 새로운 피임법을 개발하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