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이 기후 변화의 직격탄을 맞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가을이 더 길고 따뜻해지면서 꿀벌이 꽃을 찾는 시간도 늘어나 과로로 쓰러진다는 설명이다. 기후변화가 꿀벌을 중노동으로 내몬 셈이다. 온난화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꿀벌의 겨울을 인위적으로 늘리고 벌집을 관리하는 로봇까지 동원되고 있다.
◇온난화로 꿀벌 노동시간 늘어나
키르키 라자고팔란(Kirti Rajagopalan) 미국 워싱턴 주립대 교수 연구진은 26일 “기후변화로 꿀벌이 주로 활동하는 가을이 길어지면 이듬해 봄에 군집이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기후와 꿀벌 개체수 변화를 컴퓨터 시뮬레이션(가상실험)으로 예측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연구 결과는 이날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실렸다.
사람은 어느 정도 돈을 벌면 여유 있게 살 생각을 한다. 꿀벌은 그렇지 않다. 벌집에 꿀이 가득 차도 날씨가 좋으면 계속 꽃을 찾아 날아다닌다. 라자고팔란 교수는 꽃이 피는 가을이 길어지면 꿀벌이 전보다 더 오래 일을 한다고 추정했다. 꿀벌의 비행은 수명을 줄인다. 연구진은 노동시간이 늘어난 만큼 일찍 죽는 꿀벌도 많아진다고 추정했다.
연구진은 2050년과 2100년에 꿀벌 개체군이 어떻게 변할지 알아보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실행했다. 그 결과 단기, 장기 기후시나리오 모두 태평양 북서부 대부분 지역에서 겨울을 난 꿀벌 군집은 봄에 개체수가 급감할 가능성이 크다고 나왔다. 온난화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진행되는 시뮬레이션은 물론 가까운 미래에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하는 시뮬레이션에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꿀벌은 날씨가 추워지면 다른 벌들과 함께 모여 꿀을 먹고 몸을 떨면서 체온을 유지한다. 봄에 기온이 오르면 일벌이 다시 날기 시작한다. 그런데 꿀벌은 시기에 상관없이 섭씨 10도 이상이 되면 꽃을 찾아 나선다. 온난화로 가을이 전보다 따뜻하고 길어지면 꿀벌의 비행시간도 늘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는 꿀벌의 과로를 의미한다.
온난화가 이어지면 이듬해 봄에 새로 태어나는 꿀벌보다 겨울에 과로한 탓에 일찍 죽는 꿀벌이 더 많아진다고 연구진은 예측했다. 그러면 군집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벌통에 꿀벌이 5000~9000마리 미만일 때 꿀벌 군집 붕괴가 일어난다고 추정한다.
이번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워싱턴주(州) 대부분 지역에서는 꿀벌이 겨울에 이전보다 더 오래 밖에 머무르면 이듬해 봄에 군집 개체 수가 2050년까지 9000마리 미만, 2100년까지 5000마리 미만으로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집 붕괴 막기 위해 벌집 냉장 필요
논문 공동 교신 저자인 글로리아 드그란디-호프만(Gloria DeGrandi-Hoffman) 박사는 “이번 시뮬레이션은 먹이 스트레스나 병원균, 살충제가 없더라도 가을과 겨울의 기후 조건만으로도 군집의 세대 구성이 손상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드그란디-호프만 박사는 미국 농무부 산하 칼 헤이든 꿀벌연구센터에 있다.
라자고팔란 교수는 “가까운 미래에 약한 온난화도 꿀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결과”라며 “이는 지금부터 80년 뒤에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당장 대비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는 태평양 북서부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미국 전역의 꿀벌 군집도 비슷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온난화로 따뜻해진 겨울에 꿀벌이 과로로 지치기 전에 벌집에 모여들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벌통을 실내 저온 저장고에 넣어 꿀벌에게 전처럼 추운 겨울 환경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그러면 꿀벌이 비행을 멈추고 동료들과 몸을 맞대고 겨울을 나면서 개체 수가 유지된다고 연구진은 예측했다. 실제로 이번 시뮬레이션에서 위싱턴주 북단의 오막(Omak)과 같이 추운 지역에서 겨울을 나는 꿀벌 군집은 기후변화를 잘 견딜 수 있다고 나왔다.
기후변화에 맞춰 꿀벌에게 꿀을 제공할 식물을 골라 재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크리스티나 그로징거(Christina M Grozinge)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곤충학과 교수는 지난해 국제 학술지 ‘환경연구 레터스’에 “제초제 남용과 꽃 서식지 감소, 토양 생산성 저하 등 여러 요인이 꿀벌의 꿀 생산 능력을 저해했지만 1990년대 초부터 꿀 생산 감소의 주요 원인은 기온 상승과 강우 형태 변화, 기상이변을 부른 기후변화였다”고 밝혔다.
그로징거 교수는 “전보다 더 더워지고 습해질 뿐만 아니라 어떤 날씨가 올지 알 수 없는 극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며 “살충제 사용을 줄이면서 장기적으로는 변화하는 기후 조건에 맞춰 꿀벌을 위해 어떤 식물을 심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꿀벌 보호에 로봇과 스마트 벌통도 동원
지난 30년 동안 날아다니는 곤충은 전 세계에서 75%나 줄었다.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곤충은 꿀벌이었다. 미국에서는 2023년에만 꿀벌 군집 48%가 사라져 역대 두 번째로 치명적인 해로 기록됐다. 유럽도 미국보다 덜 하지만 꿀벌 군집 손실이 6~32%로 나타났다. 유럽연합(EU)은 꿀벌 군집 붕괴를 막기 위해 새로운 무기를 들었다. 벌통을 보호하는 로봇과 스마트 벌통이다.
첫 번째 프로젝트인 하이브오폴리스(Hiveopolis) 연구진은온도 센서와 난방 장치를 갖춘 스마트 벌통을 개발하고 있다. 꿀벌은 따뜻한 곳으로 모여드는 경향이 있다. 연구진은 난방 장치로 꿀벌을 특정 구역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했다. 벌통에는 곤충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시스템도 들어있다. 이런 장치로 꿀벌이 꿀과 꽃가루를 저장하는 위치를 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벌집을 비우는 시기도 결정할 수 있다.
스마트 벌통 연구는 2019년부터 진행됐다. 파사드 아르빈(Farshad Arvin) 영국 더럼대 교수는 지난해 비영리 과학매체 ‘컨버세이션’에 “실험 규모가 작아 스마트 벌통 기술이 꿀벌의 손실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는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면서도 “지금까지 결과는 희망적”이라고 밝혔다. 스마트 벌통 덕분에 겨울철 극심한 추위에도 꿀벌 군집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유럽연합이 지원하는 두 번째 프로젝트인 로보로열(RoboRoyale) 연구진은 여왕벌을 관리하는 로봇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벌통에 꿀벌 크기의 로봇 6대를 설치해 여왕벌에게 로열젤리 먹이를 주고 몸을 손질하는 방식이다. 적외선 카메라로 여왕벌 주변도 계속 관찰한다. 더럼대 아르빈 교수는 “기상이변으로 꿀벌이 밖에서 꽃과 꿀을 채집하지 못하면 여왕벌에게 애벌레를 먹인다”며 “로보로열 로봇은 이런 시기에 여왕벌에게 로열젤리를 먹여 애벌레 희생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과학이 기후변화에 내몰린 꿀벌의 동족 살해를 막아낼지 눈여겨볼 일이다.
참고 자료
Scientific Reports(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98-024-55327-8
Environmental Research Letters(2023), DOI: https://doi.org/10.1088/1748-9326/acff0c
The Conversation(2023), https://theconversation.com/faced-with-dwindling-bee-colonies-scientists-are-arming-queens-with-robots-and-smart-hives-211688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