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수천㎞ 떨어진 남극의 과학 연구를 위협하고 있다. 남극 기온 변화를 추적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과학기지가 전쟁으로 운영난에 빠진 것이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12일(현지 시각) “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연구기지에서 중요한 기후 자료를 수집하는 활동이 위협받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있는 국립남극과학센터의 올레나 마루셰브스카(Olena Marushevska) 공보관은 이날 네이처에 “극지 연구자들이 전선에서 러시아군과 싸우고 있거나 피난을 가면서 남극 탐사에 참여할 연구자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남극 기지 근대화 계획도 전쟁으로 중단된 상태이다.
◇플랑크톤 연구하다가 총을 잡은 과학자
우크라이나는 1996년부터 남극대륙 북서부에 있는 갈린데즈 섬에 베르나츠키(Vernadsky) 연구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이 기지는 원래 1947년 설립된 영국의 패러데이 기지였는데, 1995년 영국이 단돈 1파운드라는 상징적인 금액을 받고 우크라이나에 양도했다. 베르나드스키 기지는 그동안 기후변화 연구에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왔다. 마루셰브스카 공보관은 “베르나츠키 기지는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 데이터를 수집한다”며 “우크라이나의 남극 연구 프로그램이 직면한 어려움은 전 세계 과학계의 손실”이라고 말했다.
영국 엑서터대의 남극 생태학자인 루이스 헉스타트(Luis Huckstadt) 교수는 네이처에 “수십 년 동안 남극 과학자들은 베르나츠키 기지에서 수집한 기온 측정 자료 덕분에 서남극 반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온난화 지역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대의 해양생물학자인 마이클 티프트(Michael Tift) 교수도 “장기적인 관측 자료는 남극대륙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며 “남극과 전 세계의 기후변화 영향을 예측하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남극해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과학계는 전쟁으로 고사 직전이다. 수도 키이우의 남극과학센터도 지난해 10월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네이처는 이에 대해 러시아 과학부와 극지연구소에 논평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극지연구자들은 전선으로 떠났다. 남극탐사대장인 보그단 가브릴류크(Bogdan Gavrylyuk)도 이번 탐사에 참여하기 전 11개월 동안 전쟁터에서 싸웠다고 했다. 그는 하르키우 전파천문학연구소에서 일한 지구물리학자이다. 과거 2014~2015년 크림반도를 침공한 러시아군과도 싸웠는데 이번에 과거 복무한 부대로 복귀했다.
오데사 해양생물학연구소의 안드리이 조토프(Andrii Zotov)는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마자 베르나츠키 기지를 떠나 전선에 합류했다. 조토프는 남극 먹이사슬의 근간을 이루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기후변화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조사하고 있었다. 마루셰브스카 공보관은 “조토프 박사는 1년 반 전투에 참여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며 “재활치료를 받고 이제야 다시 플랑크톤 연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남극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가브리류크 탐사대장은 지난 4월부터 베르나츠키 기지에서 대원 14명을 이끌고 기상 변화 추이와 대기 상태를 관측하고 있다. 해수 염도를 측정하고 해양 포유류의 행동도 연구하고 있다. 가브리류크는 “다행히 우크라이나 정부와 과학교육부가 연구비를 지원해 일할 수 있었다”면서도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전에 남극 기지 현대화 계획을 추진했지만, 지금은 보류 상태이다.
◇남극 연구에서도 정치적 긴장 상태
남극 연구는 원칙 상 전쟁과 무관해야 한다. 1959년 12국이 만든 남극조약은 남극을 비무장 지대로 지정했다. 지금은 조약 가입국인 56국으로 늘었다. 우리나라도 1986년 33번째로 가입했다. 가입국 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29국이 남극조약협의당사국으로 연례회의에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우리나라는 1989년 협의당사국 지위를 획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남극의 평화마저 위협하고 있다. 지난 5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남극조약 연례회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정치적 긴장 속에 진행됐다. 당시 회의에서 요한나 수무부오리(Johanna Sumuvuori) 핀란드 외무부 차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시작하여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러시아의 행위가 남극조약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회의에 앞서 제출한 문서를 통해 이번 남극조약 회의의 ‘정치화’를 비판했다. 러시아는 전쟁이 우크라이나 남극 연구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국립남극과학센터의 에브겐 디키(Evgen Dykyi) 소장은 당시 회의에서 “남극과 남극조약은 우주 어딘가 있는 것이 아니다”며 “유엔의 기본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당사자가 ‘탈정치화’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마루셰프스카 남극과학센터 공보관은 네이처에 “한때 남극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과학자들이 서로 관측 정보를 공유하며 협력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단절됐다”며 “남극과 평화 지역에 있다고 해서 여기서 적이 되고 저기서 친구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 연구소 폭격 피해, 과학자 죽음도 잇따라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과학 연구 기반을 잃었다. 대학과 연구소가 포격으로 파괴됐다. 특히 우크라이나 명문대와 연구소들이 몰려 있는 동부의 히르키우는 연일 폭격을 받아 과학자와 연구 시설의 피해가 컸다.
지난해 5월 14일 히르키우에 있는 국립식물유전자원센터는 러시아군의 포격에 불타버린 씨앗과 연구시설을 찍은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이곳은 세계 열째 규모의 종자은행으로, 식물 1802종의 종자 자원 15만여 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다행히 피해는 일부에 그쳤지만, 인류의 공동 유산인 종자가 전쟁으로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연구자들도 외국으로 피난을 가거나 군대에 징집됐다. 목숨을 잃은 과학자도 속출했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해 4월 전쟁 초기 러시아군의 폭격이나 총격에 희생된 과학자 12명을 소개했다. 안드리 크라브첸코(Andriy Kravchenko·41) 박사는 지난 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근교에 있는 연구소로 차를 몰고 가다가 러시아군이 설치한 지뢰에 희생됐다. 추이코 표면화학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인 크라브첸코 박사는 몇 년 동안 의료진이 도착하기 전에 부상 병사에게 사용할 응급처치용 혈액 응고제를 개발해왔다.
촉망받던 수학자도 희생됐다. 2017년 유럽 여학생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받았던 키이우 국립대의 율리아 즈다노브스카(Yulia Zdanovska·21)는 고향인 하르키우에서 우크라이나군을 돕다가 희생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는 지난해 3월 즈다노브스카를 기려 우크라이나 고등학생을 위한 수학연구프로그램인 ‘율리아의 꿈’을 출범시켰다. MIT 수학과 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은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인터넷을 통해 우크라이나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계획이다.
데니스 쿠르바토프(Denys Kurbatov) 우크라이나 교육과학부 차관은 지난 5월 19일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과학의 날’ 행사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손실은 당연히 인적 자본”이라며 “현재 우크라이나 과학자의 10% 이상, 아마도 최고의 과학자들이 나라를 떠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네이처지는 “우크라이나 과학을 재건하는 과정이 구소련의 연구시스템에서 벗어나 서방과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국가과학기술개발위원회 과학위원장인 올렉시 콜레주크(Oleksiy Kolezhuk) 키이우대 교수는 “과학자들에게 거의 권한을 주지 않는 구소련 시대의 구조에서 벗어나 유럽연합의 연구 인프라와 더 긴밀하게 연계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3-02764-6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3-02031-8
Science(2022),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bq6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