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이 ‘지구 최강의 생존자’라는 별명을 가진 물곰이 약 5억년 전에는 지금보다 1000배 가량 몸집이 더 컸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김지훈 극지연구소 연구원이 이끄는 국제 연구진은 “5억년전 화석을 연구해 물곰으로 알려진 ‘완보(緩步)동물’의 조상과 진화 과정을 찾아냈다”고 9일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지난달 3일 게재됐다.
완보동물은 ‘느리게 걷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1776년 이탈리아 과학자 스팔란차니가 같은 뜻의 이탈리아어로 ‘타르디그라도(il Tardigrado)’라고 이름을 붙였다. 물속을 헤엄치는 곰처럼 생겼다고 ‘물곰(water bear)’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이끼에 주로 살아 ‘이끼 돼지(moss piglet)’라고도 한다.
완보동물은 곤충과 거미, 갑각류 등이 포함된 절지동물의 이웃이다. 1773년 독일의 목사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해발 5546m의 히말라야산맥에서부터 일본의 온천과 바다 밑바닥, 남극까지 지구 곳곳에서 900여종이 확인됐다. 다리가 8개이고 끝에는 곰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나있다. 입에는 단검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있어 먹잇감인 플랑크톤을 찔러 죽인다. 화석을 통해 5억년 전부터 지구에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물곰은 극한(極限) 동물이다. 다수의 연구를 통해 물곰 또는 완보동물은 우주나 남극 같은 일반적으로 생물이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수십년 동안 음식은 물론 물 없이도 살 수 있으며, 섭씨 영하 273도의 극저온이나 물이 끓는 온도를 한참 지난 151도 고열에도 끄떡없다. 1948년 한 이탈리아 동물학자는 박물관에서 보관하던 120년 된 이끼 표본에 물을 붓자 그곳에 있던 물곰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치명적 방사선을 맞아도 살 수 있다. 동물 대부분이 10~20그레이 정도의 방사선량에 목숨을 잃는데 물곰은 무려 5700그레이의 방사선도 견딘다.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海溝)보다 6배나 높은 수압도 견딘다. 미 항공우주국은 2013년 3월 6일 ‘오늘의 천문 사진’에 이끼에 매달린 물곰을 싣고는 ‘지구에 사는 동물 중 외계 생명체로 가장 적합한 후보’로 꼽았다.
그러나 현재의 물곰이 되기까지 기원이나 진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었다.
김 연구원은 미국과 중국 등의 국제 공동연구진과 함께 현생 완보동물 40여 종과 5억년 전 엽족동물들의 화석 형태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연구진은 중간 머리 부분에 존재하는 한 쌍의 기관, 두 종류의 몸통 다리 등 공통 형질을 가진 엽족동물 ‘루올리샤니드’가 완보동물의 조상임을 발견했다. 엽족동물은 마디가 없는 다리를 지닌 벌레 형태의 동물로 현재는 멸종되어 화석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화석에서 확인한 루올리샤니드의 크기는 2~10cm였다. 일반적으로 다 자라도 1mm가 안 되는 지금의 완보동물보다 최대 1000배 큰 셈이다. 루올리샤니드는 완보동물과 달리 긴 앞다리를 가지고 있고, 앞다리에 난 털로 작은 먹이를 모으거나 걸러 먹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연구진은 완보동물이 5억 년 전 형태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하기까지 특정 유전자의 소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연구는 고생물학과 현생 생물학을 융합해 완보동물의 조상을 밝힌 드문 사례다. 극지연구소는 “두 학문을 전공한 김 연구원의 독특한 이력 덕분에 수억 년 전 화석동물과 현생 동물을 비교하며 진화 과정 추적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에 교신저자로 참여한 박태윤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극지는 높은 화석 연구 잠재력을 보유한 매력적인 지역으로, 고생대 생물의 흔적이 잘 남아있는 북그린란드 시리우스 파셋 등에서 이미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이다”며 “동물 기원과 지구의 역사를 밝혀내기 위한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강성호 극지연구소장 역시 “학문 간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융합연구를 장려해 앞으로도 세계가 놀랄만한 연구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PNAS(2023), DOI: https://doi.org/10.1073/pnas.221125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