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에 사는 물고기가 자신보다 큰 물고기의 등에 붙어 먹잇감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이버들이 종종 그런 모습을 관찰했지만 실험을 통해 이런 은신술이 사냥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제임스 허버트 리드(James Herbert-Read) 교수와 새뮤얼 매체트(Samuel Matchette) 박사 연구진은 지난 7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대서양 주벅대치(학명 Aulostomus maculatus)가 자신보다 더 크고 위협적이지 않은 물고기 종을 위장막으로 사용해 먹잇감인 자리돔에 접근하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오리 사냥꾼의 은신술, 바다에도 통해
실고기목(目)에 속하는 대서양 주벅대치는 몸통이 길어 트럼펫 물고기(trumpetfish)로 불린다. 몸길이가 50㎝나 되고 주둥이가 커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연구진은 카리브해의 다이버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해 주벅대치가 자신보다 훨씬 큰 파랑비늘돔(Sparisoma viride)이나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왜 주벅대치가 다른 물고기와 같이 이동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은 주벅대치가 은신술로 먹잇감의 눈에 띄지 않고 접근한다고 보고 실험으로 가설을 입증했다. 연구진은 주벅대치와 비늘돔 모형을 줄에 매달아 산호초에 사는 실제 자리돔 무리에 접근시켰다.
실험에서 주벅대치가 혼자 접근하면 자리돔은 어떤 물고기가 오는지 살펴보다가 바로 몸을 피했다. 반면 비늘돔만 오면 자리돔들은 위협으로 보지 않고 평소처럼 행동했다. 연구진은 비늘돔 모형에 주벅대치 모형을 붙여 접근시키면 역시 자리돔들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주벅대치가 자리돔을 사냥할 때 비늘돔을 위장막으로 쓴다는 것이다.
주벅대치의 은신술은 사람도 사냥에 쓰는 방법이다. 사냥꾼이 물오리를 사냥할 때 말 뒤에 숨어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오리는 말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사냥꾼에 당한다. 사냥꾼은 실제 말 대신 골판지로 만든 말 모형을 들고 물오리에 접근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군도 거대한 목마에 몸을 숨겨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에 침투했다. 주벅대치는 살아있는 파랑비늘돔을 트로이 목마로 이용한 셈이다.
산호초에서 물고기가 다른 종과 같이 사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가 참바리와 곰치이다. 참바리는 덩치가 커서 산호 틈에 숨어있는 먹잇감을 잡을 수 없다. 반면 뱀장어처럼 길쭉한 몸을 가진 곰치는 산호 틈에 자유자재로 들어간다. 스위스 과학자들은 지난 2006년 '플로스 바이올로지'에 참바리와 곰치의 협동 사냥술을 발표했다.
참바리는 곰치에게 다가가 머리를 흔들며 사냥을 제안한다. 곰치가 따라나서면 참바리는 산호 틈에 거꾸로 서서 먹잇감이 숨어있다고 알려준다. 곰치가 좁은 산호 틈을 뒤져 먹이가 튀어나오면 기다리던 참바리가 낚아챈다. 참바리와 곰치는 공동 사냥으로 둘 다 이득을 보지만, 이번에 밝혀진 은신술 사냥에서는 주벅대치만 이득을 본다는 점이 다르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온난화로 은신술 쓰는 어류 늘 것"
주벅대치는 비늘돔 등에 숨는 은신술 외에 주변의 해초나 작대기에 몸을 숨기거나 몸 색깔을 맞추는 방법도 사용한다. 물기둥에서 입을 벌리고 수직으로 하강하면서 먹이를 물기도 한다. 하지만 먹잇감 주변에 숨을 곳이 없을 때는 비늘돔 등에 붙에 숨는 방법을 선호한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캘리포니아 과학아카데미의 어류 큐레이터인 루이츠 로차(Luiz Rocha) 박사는 뉴욕타임스지에 "오랫동안 다이버와 연구자들이 주벅대치의 행동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실험으로 은신술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다른 동물들도 오리 사냥꾼이 쓰는 은신술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은 기후변화 탓에 주벅대치의 은신술이 산호초에서 보편적인 행동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논문 제1 저자인 새뮤얼 매체트 박사는 "기후변화로 몸을 숨길 산호가 줄면 다른 큰 이웃을 위장막으로 쓰는 것이 보편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벅대치가 사는 산호초는 바다의 열대우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양생물의 보고이다. 산호초에 사는 생물은 바다 생물종 3분의 1을 차지한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 산호의 절반이 지난 30년 사이 사라졌다. 특히 2015~2017년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산호의 몰락은 미세 조류와의 공생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온이 여름 최고 온도보다 섭씨 1도만 올라가도 공생조류가 산호를 빠져나간다. 연구자들은 움직이는 다른 물고기 뒤에 숨는 전략이 동물들이 환경 변화의 영향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Current Biology(2023), DOI:https://doi.org/10.1016/j.cub.2023.05.075
PLoS Biology(2006),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bio.0040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