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높거나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사는 길고양이가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기생충을 더 많이 퍼뜨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 세계가 기후변화로 매년 평균 기온이 오르고 있고, 국내에 인구 밀집 지역이 많은 만큼 길고양이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병리학 연구팀과 네브래스카 링컨대 수의과대학 연구진은 21일(현지 시각) 기후변화로 기온이 높아지면서 기온 변동이 크거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 사는 고양이들이 기생충인 톡소포자충(Toxoplasma gondii) 알을 더 많이 배출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톡소포자충은 주로 쥐와 고양이, 사람으로 전염되는 기생충이다.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전세계 인구의 약 33%가 감염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강한 사람이 감염되면 대부분 별다른 증상이 없다. 하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이 감염되면 뇌염이나 폐렴이 발생할 수 있고, 임산부가 감염되면 유산 위험도 있다. 톡소포자충은 고양이 몸 안에서 증식하고 나중에 알을 바깥으로 퍼뜨린다. 감염된 고양이의 분변을 만진 다른 고양이나 사람은 톡소포자충에 전염될 수 있다.
연구진은 톡소포자충과 기후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학계에 보고됐던 연구 데이터 47건을 분석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사는 고양이들이 톡소포자충 알을 퍼뜨리는 양을 비교하고, 이와 관련 있을 만한 인간 활동, 기후 요인을 분석했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사람이 키우다가 버린 길고양이, 길고양이 중에서도 사람이 주기적으로 밥을 주는 고양이, 들에서 사는 야생 고양이 등으로 분류했다.
분석 결과 연구진은 기후변화로 기온이 높아지면서 기온 변동이 크거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 사는 고양이들이 톡소포자충 알을 더 많이 배출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기온과 습도가 함께 높아지는 지역에 사는 고양이는 털갈이를 자주 해 그만큼 톡소포자충을 많이 뿌린다고 분석됐다.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등이 많아 쥐와 고양이 등 야생 동물이 모이기 쉽고, 인간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이 지목됐다. 또한 이런 지역에서는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야생고양이들이 아직 감염되지 않은 길고양이와 만나 전염시킬 기회도 많아졌다.
연구진은 기온 상승과 인구 밀집이 톡소포자충 감염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전염을 확산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사람이 감염되면 대부분은 무증상으로 지나치더라도 임신부와 태아, 면역저하자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 수 있는 만큼 길고양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학계에서는 그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톡소포자충 감염증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연구진의 보고에 따르면 아직 많지는 않지만 국내에서도 톡소포자충 감염률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특히 미국 연구진이 지적한 요인인 ‘인구 밀집 지역’이 많은 만큼 길고양이와 야생고양이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8월 서울대 의대 열대의학교실과 질병관리청 인수공통감염병관리과 연구진은 질병관리청 보고서를 통해 국내 톡소포자충 감염증이 매년 증가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 2020년까지 5917명이 감염됐다고 보고했다. 특히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상급병원 4곳에서 진단받은 538명 중 해외에서 감염된 사례는 단 14건(2.6%)뿐이었다. 국내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던 톡소포자충 감염증이 이미 국내에서 토착화해 연중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연구진은 톡소포자충 감염자는 대부분 무증상이라 본인이 감염됐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국내 감염자의 약 28.2%가 위험군인 가임기 여성이라는 점, 의료기관에서 질병관리청으로 신고하는 비율이 3.5% 정도로 매우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각 감염자들이 어떻게 톡소포자충에 감염되는지 정확한 경로를 확인하고, 국가적으로도 ‘국내 발생 질병’으로 분류해 감시와 예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톡소포자충 감염증에 대한 공포가 길고양이 혐오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톡소포자충 감염의 주요 원인은 고양이가 아니라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날고기를 먹기 때문이라고 꼽았다. 특히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톡소포자충에 감염돼 사람에게 퍼뜨릴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다만 국내 발생률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만큼 야생 고양이나 길고양이가 톡소포자충의 중간 숙주가 되지 않도록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 연구 결과는 지난 21일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실렸다.
참고 자료
PLOS ONE, DOI :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286808
Public Health Weekly Report, DOI : https://doi.org/10.56786/PHWR.2022.15.37.2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