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일, 박민수 전 복지부 1·2차관./복지부

보건당국 고위 관료들이 퇴임 이후 학계와 제약·바이오 업계로 잇따라 이동하고 있다. 정책과 규제를 다뤄온 '정통 관료'들이 현장을 바꿔 활동 반경을 넓히는 흐름이다.

23일 의료계와 제약업계에 따르면 주요 대학들은 보건당국 고위 관료 출신 인사를 영입해 정책·연구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으며, 제약회사들도 규제 대응과 사업 전략 고도화를 위해 관료 출신 인사 모시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30년 넘게 보건복지부에 몸담으며 윤석열 정부에서 제1·2차관을 맡았던 이기일·박민수 전 차관은 나란히 학계로 자리를 옮겼다.

이기일 전 보건복지부 1차관은 지난해 퇴직 이후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도시의 감염병 대응과 기후위기, 저출산·고령화 등 복합적인 보건의료 문제를 다루는 인재 양성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 원장은 보건의료정책실장, 건강보험정책국장 등을 거쳐 윤 정부에서 제2차관과 제1차관을 연이어 맡으며 부처 전반을 총괄했다.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을 둘러싸고 의료계와 갈등의 중심에 섰던 박민수 전 복지부 2차관은 최근 가톨릭관동대 행정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국가 성장·사회보장 분야 연구를 담당할 계획이다. 다만 소식이 알려지자 해당 대학 의대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이 이어져 몸살을 앓고 있다.

박 전 차관은 앞서 퇴직 직후에는 경영컨설팅 업체 노바피이에이(NOVAPEA) 대표를 맡아 투자 자문과 인수합병(M&A) 사업도 해왔다.

코로나19 방역 분야 핵심 인사였던 지영미 전 질병관리청장도 연구·교육 현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한국파스퇴르연구소장 재직 중 질병청장으로 발탁된 뒤, 퇴임 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한국파스퇴르연구소 스쿨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지영미 질병관리청장이 2023년 5월 11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뉴스1

제약·바이오 업계로의 이동도 두드러진다. 정책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의 전략 수립과 규제 대응 역량을 강화하려는 수요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기일 전 차관은 최근 HLB제약(047920) 사외이사로도 선임됐다. 문재인 정부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권덕철 전 장관은 법무법인 세종 고문을 거쳐 지난 2월 일성아이에스(003120)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업계에서는 정책 흐름을 읽고 대외 리스크를 관리하는 역할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권덕철 전 복지부 장관, 채이배 전 의원./연합뉴스

식품의약품안전처 출신 인사들도 잇따라 기업으로 향하고 있다. 이의경 전 식약처장은 SK바이오사이언스(302440) 감사위원회 위원으로 합류했다. 자체 백신 개발과 위탁개발생산(CDMO)을 병행하는 기업 특성상 임상, 허가, 규제 전략의 중요성이 큰 만큼 전문성을 보강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종근당바이오(063160)는 박인숙 전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바이오생약심사부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바이오의약품 허가를 담당하는 핵심 부서 출신 인사를 영입해 원료의약품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다.

한미약품(128940)은 공인회계사이자 20대 국회의원 출신인 채이배 전 의원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국민연금이 선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최종 승인됐다. 채 사외이사는 경기도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승인을 받은 시점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조건부로 선임됐으며, 승인 시점은 이달 중 관계당국 절차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정책과 규제를 설계했던 인사들이 기업과 학계로 이동하면서 경험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다만 공직 경험과 민간 활동 사이의 이해충돌 관리도 함께 요구된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