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암세포(붉은색)가 마블 코믹의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처럼 표면의 당단백질을 방패 삼아 면역 세포인 대식세포(흰색)의 공격을 막아내는 모습./챗GPT 생성 이미지

백혈병 환자의 암세포가 면역 체계의 공격을 피하는 새로운 무기가 발견됐다. 이전에는 암세포를 정상 세포로 속이는 위장 신호가 발견됐다면, 이번에 찾은 무기는 만화 캐릭터인 캡틴 아메리카의 비브라늄 방패처럼 면역 세포의 공격을 직접 막는 코팅막이었다. 혈액암뿐 아니라 다른 암들에도 같은 방패가 있어 앞으로 암 치료에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토드 골럽(Todd Golub) 미국 브로드 연구소 소장 연구진은 "백혈병 세포가 표면에 있는 CD43이라는 당단백질로 물리적 장벽을 형성해 면역세포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확인했다"고 지난 9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브로드 연구소는 미국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 공대(MIT)가 공동 설립한 생명과학 연구 기관이다.

◇급성 백혈병 치료에 대안 제시

백혈병은 뼈 안쪽 골수에서 백혈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적혈구와 혈소판, 백혈구 같은 혈액 세포를 만들지 못하게 되는 혈액암이다. 앞서 과학자들은 혈액암에 걸린 세포는 표면에 CD47이라는 단백질이 있어 면역 체계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알아냈다. 면역 세포인 대식세포는 암세포나 외부 침입자를 먹어 치운다. 혈액암 세포의 CD47은 이런 대식세포에 '나를 먹지 마라'는 신호가 된다.

문제는 CD47을 차단하도록 만든 약물이 다른 암에는 잘 듣는데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브로드 연구소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백혈병 세포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수천 개를 분석했다. DNA에서 원하는 부위를 자유자재로 잘라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유전자를 하나씩 차단하면서 대식세포의 반응을 살폈다.

실험 결과 CD43을 만드는 유전자를 차단하자 대식세포가 다시 암세포를 먹어 치웠다. CD43이 대식세포의 공격을 막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엉뚱하게 CD47을 공략해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치료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상과 달리 CD43은 CD47처럼 대식세포에 '먹자 마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 연구진은 면역 세포가 CD43 당단백질로 둘러싸인 암세포에 물리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냈다.

백혈병 세포는 사슬 모양의 CD43 당단백질을 '방패'로 삼아 대식세포의 공격을 막아낸다(왼쪽). CD43을 차단하자 대식세포, T세포, NK(자연살해)세포 등 면역 세포들이 백혈병 세포를 공격했다(오른쪽)./미 브로드 연구소

CD43은 기다란 당단백질 사슬이다. 이를테면 암세포 표면을 가시나무로 둘러싼 것과 같았다. 실험에서 CD43 유전자를 변형시켜 당단백질의 사슬 길이를 짧게 하자 대식세포가 쉽게 암세포를 잡아먹었다. 가시나무가 짧아지면서 인체 방어군이 쉽게 담장을 넘어 공격할 수 있었던 셈이다.

백혈병 세포에서 CD43을 억제하면 대식세포는 물론, T세포와 자연살해(NK)세포 같은 면역 세포들의 공격력도 높아졌다. CD47이 대식세포의 식세포 작용만 막는 거짓 정보를 줬다면, CD43은 종류에 상관없이 면역 세포를 막는 물리적 장벽이었던 것이다.

◇암 면역 치료의 새 길 열어

연구진은 다른 암세포들도 면역 체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당단백질로 두꺼운 보호막을 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백혈병 세포의 CD43을 다른 암세포에서 많이 발견되는 당단백질인 MUC1으로 대체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면역 세포를 가로막는 장벽 효과가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번에 거의 모든 암에서 작용하는 면역 회피의 기초 원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며 "이를 해체하는 방법을 알아내면 백혈병을 넘어 다른 암들까지 면역 세포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CD43을 공략해 급성 골수 백혈병을 치료했듯, 다른 암에서도 물리적 장벽이 되는 당단백질을 공격해 치료 효과를 거두겠다는 계획이다. 대식세포를 교란하는 CD47을 같이 공략하면 효능이 배가될 수 있다.

현재 연구진은 CD43에 결합하는 항체를 찾고 있다. 대식세포가 CD43 장벽에 가려진 암세포를 못 보고 지나간다면, 대신 항체가 CD43을 찾아 대식세포에게 그 안에 암세포가 있다고 알려주자는 계획이다. 실제로 실험실에서 이 방식을 쓰자 대식세포가 백혈병 세포를 더 쉽게 찾아 잡아먹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참고 자료

Science(2026),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y5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