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 검증 절차 약화와 건강보험 재정 부담 확대 우려 속에서도 희귀질환 치료제 신속 등재를 포함한 약가제도 개편안이 26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를 통과했다. 정부는 혁신 신약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는 입장이지만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제도 취지와 영향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4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무상의료운동본부는 24일 청와대 사랑채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환자 희망을 볼모로 제약사만 배불리는, 효과 검증도 안 된 희귀약 신속 등재에 반대한다"고 밝혔다./무상의료운동본부

◇'선등재 후평가' 도입…실제 진료 데이터 기반 사후 검증

보건복지부는 이날 건정심에서 희귀질환 치료제의 건보 등재 기간을 기존 최대 240일에서 100일 이내로 단축하는 신속 등재 절차 도입과 비용효과성 평가 기준(ICER) 개선, 약가유연계약제 확대 등을 포함한 약가제도 개편 방향을 확정했다.

이번 개편안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이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적정성 평가 기간은 기존 최대 150일에서 1개월 수준으로 단축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약가 협상 기간도 최대 60일에서 1개월로 줄어든다. 이후 복지부와 건정심 심의까지 포함한 전체 등재 절차를 100일 이내로 관리하는 것이 정부 목표다.

신속 등재된 치료제에 대해서는 이후 실제 진료 현장에서 축적되는 실사용자료(RWE)를 활용해 임상 효과와 비용효과성을 사후 평가하는 체계를 도입하기로 했다. 평가 결과에 따라 약가 수준과 급여 범위, 위험분담제 적용 여부 등은 조정될 수 있다.

혁신 신약의 경제성 평가 기준인 ICER도 함께 손질된다.

ICER는 비교 치료 대비 추가로 투입되는 비용 대비 얻는 건강 개선 효과를 수치화한 지표다. 일정 임계값 이하일 때 비용효과성이 인정된다. 통상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산정되며 국내에서는 약 5000만원 수준이 사실상 준거선으로 활용돼 왔다.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의 경우 약 2배 수준까지 탄력 적용돼 왔다.

정부는 질병의 위중도와 치료 효과, 건보 재정 영향 등을 반영한 가중치를 적용해 ICER 기준을 보다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기로 했다. 관련 정책 연구는 연내 진행되며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약가유연계약제 적용 대상은 신규 등재 신약뿐 아니라 특허 만료 오리지널 의약품, 위험분담제 종료 신약, 바이오시밀러 등으로 확대된다.

이른바 '이중계약제'로도 불리는 약가유연계약제는 외부에 고시되는 표시 약가는 해외 주요국과 유사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가 실제 적용 가격을 별도로 계약하는 방식이다. 표시 가격과 실제 거래 가격을 분리하는 구조다.

그동안 국내 약가가 해외보다 낮게 형성되면서 다국적 제약사가 한국 시장 출시를 늦추거나 제외하는 이른바 '신약 코리안 패싱'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 또 국제적으로 의약품 가격 협상 과정에서 각국 약가가 참조 가격으로 활용되는 구조 때문에 국내 약가 수준이 낮을 경우 국내 제약사의 의약품 수출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 국제적으로 의약품 가격 협상 과정에서 각국 약가가 참조 가격으로 활용되는 구조 때문에 국내 약가 수준이 낮을 경우 국내 제약사의 의약품 수출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부는 비용효과성이 불확실한 일부 약제에 대해 치료 효과가 입증되지 않을 경우 제약사가 보험 약품비 일부를 공단에 환급하는 형태의 이중 약가 구조를 제한적으로 운영해 왔지만 적용 조건이 까다롭고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효과 미검증 약제 재정 부담 우려"…이중계약 투명성 우려도

정부는 이번 개편을 통해 희귀질환 치료제와 혁신 신약의 건보 적용 시점을 앞당겨 환자 치료 접근성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약제비 지출 증가에 따른 보험료 인상 압박과 재정 지속가능성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4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무상의료운동본부는 지난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신속 등재 제도가 기존 선별등재 시스템을 약화시키는 조치라고 주장했다.

희귀질환 치료제의 경우 임상 3상 시험 없이 허가를 받는 사례가 있는 데다, 조건부 허가 약물 가운데 약 40%가 최종 단계에서 효과를 입증하지 못하거나 시장에서 퇴출되기도 한다는 지적이다.

본부는 연간 수억원 수준의 희귀질환 치료제 약 50여개가 급여에 포함될 경우 수조원 규모의 추가 재정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고도 했다. 한 번 급여에 등재된 의약품은 현실적으로 퇴출이나 약가 조정이 쉽지 않다는 점도 강조했다.

ICER 역시 탄력 적용 사례가 누적될 경우 정부의 약가 협상력이 구조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선례가 축적될수록 신규 혁신 신약의 평균 약가 수준이 상향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학계 전문가 13명은 공동 의견서를 내고 "현행 ICER 임계값이 과도하게 낮다는 과학적 근거는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며 "질병 위중도에 따른 탄력 적용과 임계값 상향은 개념적으로 구분돼야 한다"고 밝혔다.

약가유연계약제 확대를 둘러싼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는 입법예고 기간 의견서를 통해 "국민들은 의약품 급여 결정 과정뿐 아니라 실제 가격 정보에도 접근이 제한된 상황"이라며 "확대된 모든 약에 대해 공정한 협상이 이뤄졌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항암제와 중증질환 국내 신약은 이미 위험분담제를 적용받고 있고, 당뇨병 치료제 등은 기존 유사 제품과 비교해 약값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약가유연계약제가 해외 가격 경쟁력 확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비밀 합의된 금액 구조는 환자 부담과 건강보험 재정 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미 복제약과 바이오시밀러가 다수 존재하는 의약품까지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설명이 부족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