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늘 쓰던 물건인데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고 한다. 길을 잃는 경우도 많다. 앞으로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기억력을 높일 수 있는 약물이 개발될 길이 열렸다. 몸에서 알코올이나 포도당 또는 섬유질이 많은 식품을 분해할 때 나오는 부산물이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동물 실험 결과가 나왔다.
가보르 에거바리(Gabor Egervari) 미국 워싱턴대 의대 교수 연구진은 "생쥐에게 아세테이트를 주입하면 뇌의 장소 기억 중추인 등쪽 해마의 기능이 향상되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지난 24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시그널링'에 발표했다.
아세테이트는 몸 안의 소화 과정에서 나오지만 화합물 형태로 식품 산업에서도 많이 쓴다. 주로 껌이나 사탕, 빵, 아이스크림에서 과일향을 내거나 차·커피의 카페인을 빼는 데 활용된다. 단 아세테이트는 동물 실험에서 암컷에만 효과가 있었다. 인간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노년기 여성의 인지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위치 바뀐 물체 기억하고 더 탐색
해마는 뇌의 기억과 학습 중추인데, 등 쪽은 주로 장소 기억을 담당한다. 맛집을 기억하고 찾아가는 데 필수적인 영역이다. 배 쪽 해마는 감정과 스트레스를 다루는 것과 달리, 등 쪽은 상대적으로 인지 기능을 집중적으로 수행한다.
연구진은 생쥐에게 같은 물체 두 개를 주고 10분간 탐색하도록 했다. 24시간 뒤 다시 물체를 보여줬다. 그중 하나는 다른 위치로 옮겨져 있었다. 에거바리 교수는 "기억이 온전한 쥐는 어제는 그 물체가 다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고 말했다.
기억력이 좋은 쥐들은 위치가 바뀐 물체를 더 많이 가지고 놀았다. 위치가 달라져 새로운 자극을 준 것이다. 기억이 손상된 생쥐는 달랐다. 두 물체를 같은 시간 동안 가지고 놀았다. 위치가 바뀐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똑같은 물체로 봤다고 설명할 수 있다.
다음에는 생쥐 한쪽에는 아세테이트를 투여하고 다른 쪽은 가짜 약으로 생리식염수를 줬다. 같은 기억 실험을 했을 때 아세테이트를 투여받은 암컷 생쥐가 생리식염수를 준 생쥐보다 더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수컷 쥐는 아세테이트를 투여해도 기억력이 향상되지 않았다.
◇유전자 동일해도 구조 바뀌어 효과
연구진은 아세테이트가 유전자는 그대로 두고 구조만 바꿔 기억력을 높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세테이트는 뇌에서 히스톤 아세틸화를 통해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켰다. 실이 실패에 감겨 있듯 유전자가 있는 DNA 가닥은 히스톤이란 단백질에 감겨 있다. 유전자가 작동하려면 히스톤에 아세틸이 붙으면서 DNA 가닥이 풀려야 한다.
연구진은 장기 기억과 관련이 있는 H2A.Z 단백질에서 히스톤 아세틸화를 확인했다. 그러자 학습 관련 유전자의 활동이 증가했다. 암컷 쥐에서는 등쪽 해마에서 Nr4a3과 Ptgs2와 같은 기억 관련 유전자 발현이 증가했다. 바로 후성유전학적 효과라는 말이다. 이름 그대로 태어날 때 물려받은 DNA 유전 정보는 변함이 없지만 나중에 DNA의 구조적 변화로 유전자 기능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후성유전학 연구자인 호주 시드니 공대의 라지아 자카리아(Razia Zakarya) 박사는 네이처지에 "이번 연구는 소화의 부산물이 어떻게 후성유전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기억을 형성하는지 보여준다"며 "아세테이트는 학습 중 신경 활동이 나타날 때만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즉 뇌가 뭔가 기억할 때만 유전자 구조를 바꾸는 효과를 낸다는 말이다.
연구진은 아세테이트가 인간에게 같은 효과를 낸다면 알츠하이머병이나 노화 관련 인지 기능 저하에 더 취약한 여성들을 위한 치료법을 개발할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아세테이트 주사가 인지 기능에 문제가 있는 생쥐의 기억력 감퇴를 막을 수 있는지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참고 자료
Science Signaling(2026), DOI: https://doi.org/10.1126/scisignal.aec0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