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은 다소 잠잠했지만 또 다른 바이러스 전염병이 세계 곳곳에서 창궐했다. 조류와 젖소에 퍼진 고병원성(H5N1)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가 사람으로 전파된 사례가 잇따라 발생하며 팬데믹(대유행) 공포가 퍼졌다. 모기가 전파하는 뎅기열과 동물에서 옮아온 엠폭스(MPOX·옛 명칭 원숭이두창) 발병이 기록적으로 급증했고,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전쟁터인 가자지구를 덮쳤다. 2024년을 위협한 바이러스들이다.
◇사람 위협하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조류 인플루엔자는 미국 농장에서 젖소 사이로 퍼졌다가 나중에 사람으로 전파된 사례가 잇따랐다. H5N1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이름처럼 원래 철새나 가금류 같은 조류만 걸렸지만, 최근에는 포유류까지 퍼졌다.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물론, 여우와 고양이, 흰족제비, 물개, 돌고래, 미국너구리 등 야생동물도 잇따라 감염됐다. 이어 올해 초부터 젖소와 접촉한 농장 노동자들이 감염됐다. 17일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에 따르면 지금까지 미국 농장 노동자 58명이 H5N1 바이러스 양성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 아직 H5N1형 바이러스가 사람끼리 번진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 보건 당국과 연구자들은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한 돌연변이 발생 가능성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사람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걸리면 치명률이 높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에 따르면 조류 인플루엔자 인체 감염의 치명률은 약 35~40%인데, 고병원성인 H5N1 인체 감염 치명률은 60%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토대로 H5N1 인체 감염이 대유행할 경우 300일 만에 인구의 41.8%가 감염되고 중증 환자가 약 29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기온 상승에 뎅기열 발병 급증
모기가 전파하는 뎅기열 환자도 급증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등 남미 지역에서 극성을 부리던 뎅기열이 북미로 퍼져 감염 환자가 급증했다. 12월 초까지 북미에서 보고된 뎅기열 발병 사례만 약 1270만건이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작년에 보고한 세계 기록인 530만건보다 2배를 넘는 규모다.
뎅기열은 뎅기 바이러스를 가진 이집트숲모기(학명 Aedes aegypti)와 흰줄숲모기(Aedes albopictus)에 물려 감염되는 병이다. 모기에 물리고 5~7일 지나면 고열·두통·오한이 발생한다. 감염자 중 5%는 뎅기 출혈열 같은 중증으로 진행되면서 사망에 이른다.
올해 뎅기열과 같은 계열의 질환인 오로푸체 바이러스(OROV) 확진자도 늘었다. 이 바이러스는 나무늘보나 원숭이 등을 숙주로 삼는데 작은 파리나 모기에 의해 사람까지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발열과 오한·두통·근육통·메스꺼움·구토 등 뎅기열과 증상도 비슷하다.
과학자들은 기온 상승을 부른 기후변화와 도시화가 뎅기열 발병 급증의 주원인이라고 지목했다. 중국 베이징 사범대 연구진은 “인도양의 해수면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전 세계 뎅기열 환자가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 5월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지역 내 뎅기열 발생이 온난화가 없던 시기보다 약 18% 증가했다는 분석도 내놨다.
◇엠폭스, 아프리카 대륙 넘어 20개국 전파
엠폭스(MPOX·옛 명칭 원숭이두창)는 올해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과 인접 국가로 번졌다. 나중에는 아프리카 대륙을 넘어 미국, 스웨덴, 파키스탄, 필리핀 등에서도 감염 사례가 줄줄이 보고됐다. 지난 10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올해 과학기술계를 빛낸 10명을 발표했는데, 그중 한명이 콩고민주공화국 국립생의학연구소의 역학자인 플라시드 음발라(Placide Mbala) 박사였다. 그는 엠폭스가 콩고를 넘어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해 전 세계에서 발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
엠폭스는 중서부 아프리카의 풍토병으로, 수포성 발진 증상을 보이고 급성 발열과 근육통··두통을 동반한다. 올해 번진 엠폭스는 기존 유형과 다른 ‘엠폭스 하위계통 1b형’이다. 전파 속도와 환자 치명률이 상대적으로 컸고 환자 유형도 기존과 달랐다. 2022년 미국과 유럽에서 엠폭스는 주로 남성 동성애자들에 퍼졌다고 알려졌는데, 지난 10월 WHO가 콩고 내 키부주 북부 지역 환자들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확진자의 75%가 17세 이하 아동·청소년이었고 환자 성별도 남녀가 비슷했다.
덴마크 제약사 바바리안 노르딕은 엠폭스 백신 ‘진네오스(MVA-BN)’ 생산량을 확대하고, 성인뿐 아니라 청소년에게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신청했다. 진네오스는 처음에 천연두 백신으로 먼저 개발됐고, 이후 적응증을 추가해 엠폭스 백신으로 승인을 받았다. 유엔은 지난 11월 어린이 대상 최초의 엠폭스 백신을 승인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보건 시스템이 붕괴한 가자지구에서는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했다. 영구적인 근육 쇠약, 마비 등의 증상을 일으키는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오염된 물을 통해 퍼지며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WHO는 지난 7월 가자지구에서 채취한 하수 샘플에서 2형 변이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발견했고, 감염병 확산 위험을 경고했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는 지난 25년간 소아마비 발병 사례가 없었다. 소아마비는 전 세계적인 백신 예방접종으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라졌으나, 역시 전투가 빈발하고 백신 접종이 제한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환자가 잇따라 나왔다. 가자도 마찬가지였다.
참고 자료
CDC(2024), https://www.cdc.gov/bird-flu/situation-summary/index.html
medRxiv(2024), DOI: https://doi.org/10.1101/2024.01.08.24301015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j4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