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호출부호 ‘블랙’을 쓰는 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군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수도 키이우의 한 병원에 실려왔다. 의료진은 파편에 찢어진 장을 꿰매고 대장 일부를 제거한 다음 감염을 막기 위해 항생제를 놨다. 하지만 군인은 백혈구 수치가 엄청나게 오르고 패혈증 징후까지 보이면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검사 결과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항생제에 면역력을 가진 슈퍼박테리아가 발견됐다. 의료진은 최후 수단으로 한 미생물학자가 제안한 약물 조합을 군인에게 투여했다. 이런 상황은 우크라이나 병원에선 일상이 됐다. 3년째를 맞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슈퍼박테리아의 번식지가 되고 있다. 100년 전 1차 세계대전에선 항생제가 없어서 수많은 군인이 숨졌는데 한 세기만에 항생제 과용으로 전쟁터의 군인과 민간인이 숨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28일(현지 시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이 3년째에 접어들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항생제에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슈퍼박테리아의 번식지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항생제 내성은 미생물이 항생제에 노출되어도 항생제에 저항하여 생존할 수 있는 약물 저항성을 의미한다. 이는 항생제의 공격에 살아남기 위한 세균의 생존 전략으로 일부 유전자가 다른 균으로 옮겨가 내성을 전파하기도 한다. 미 육군 군의관이자 월터리드육군연구소(WRAIR) 다중약물내성유기체저장소 및 감시네트워크 책임자인 제이슨 베넷 대령은 “최근 우크라이나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들이 보고되고 있다”며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것들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항생제 내성 슈퍼박테리아 폐렴간균 등장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국내에서 ‘폐렴간균’으로 불리는 클렙시엘라폐렴균(Klebsiella pneumoniae)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항생제 내성(AMR)으로 숨지는 사망자 5명 중 1명이 이 박테리아에 감염돼 숨진다. 스웨덴과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은 국제 학술지 감염병 저널 12월호에 우크라이나 전쟁 사상자들에게서 약물에 강한 내성을 가진 독성이 강한 폐렴간균을 찾아냈다고 보고했다. 폐렴간균은 항생제 하나만 써서는 물리치지 못한다. 키이우 주재 미 컬럼비아대 글로벌건강센터 전문가인 새러 레게어 박사는 우크라이나에서 독성이 강한 폐렴간균의 발견된 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내성균이 확산하지 않도록 의료진 교육과 진단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항생제 내성 문제가 에이즈를 유발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나 말라리아보다 더 심각하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항생제 내성으로 숨지는 환자는 에이즈나 말라리아 환자 보다 많다. 국제 학술지 랜싯에 따르면 2021년 항생제 내성으로 전 세계에서 약 114만명이 숨졌고 471만명이 이후 합병증 등으로 추가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2050년까지 항생제 내성으로 숨지는 사람이 연간 100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항생제의 오남용이 내성균 발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항생제 내성 문제는 뿌리가 깊다. 다른 옛소련 국가들처럼 범용 항생제가 처방전 없이 판매되면서 오용으로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의사들은 종종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소량의 항균제를 처방해왔다.이런 주먹구구식 항생제 처방은 박테리아를 죽이지 않고 스트레스를 줘서 내성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와 분쟁은 항생제 내성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우크라이나의 내성균 감염 환자는 2014년 우크라이나 군대와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 지원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전투가 발발한 후 늘어나기 시작했다. 2020년 한 연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병원 감염의 약 20%가 다중약물내성(MDR) 박테리아와 관련이 있고 이 가운데 폐렴간균이 가장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우크라이나도 뒤늦게 항생제 판매 규제를 포함한 억제 조치를 취했지만 2022년 2월 러시아군이 침공한 이후 사실상 무명유실해졌다.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최전선 병원과 응급 진료소는 다친 군인들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졌다. 부상 군인을 후송할 수단이 없는 경우 의료진은 항생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감염을 막기 위한 예방적 사용이지만 내성 박테리아의 새로운 진화와 확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상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다. 영국 국방의료센터 전문의이자 미생물학자인 스코트 팰렛 박사는 “총알과 파편은 병원균을 더 몸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시킨다”며 “전쟁이야말로 병원균이 번성하는데 이상적인 조건”이라고 사이언스와 인터뷰에서 지적했다.
◇국제 분쟁은 슈퍼박테리아의 진원지
물리적 폭력이 자행되는 분쟁지역은 사실상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의 요람이 되고 있다.
지난 2000년대 초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도 ‘이라크 박터’라는 별명이 붙은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Acinetobacter baumannii) 박테리아가 맹위를 떨쳤다. 당시만 해도 다제 내성균용 항생제인 카바페넴의 약발이 먹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최후의 항생제인 카바페넴도 통하지 않는 박테리아가 전 세계적으로 기세를 얻게 됐다. 독성이 강한 내성 박테리아는 카바페넴 계열 항생제에 내성을 갖게 하는 뉴델리메탈로베타락타마제-1(NDM-1)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금까지 보고된 폐렴간균의 약 80%가 보유하고 있다. 이는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10배 높은 수치다.
지난해 이스라엘이 공격한 가자 지역도 최근 항생제 내성 문제가 주요 보건 이슈로 떠올랐다. 국제 학술지 랜싯은 지난해 11월 가자지구 내 병원과 하수에서 심각한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들이 발견됐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룬드대 크리스티안 리스벡 교수에 따르면 폐렴간균을 매우 강하게 만드는 요인은 다른 박테리아보다 많은 양의 점액을 생성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바이오필름을 형성하는 데 능숙하다 보니 상처 깊숙한 곳에 있는 박테리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폐렴간균이 다른 박테리아에서 직접 내성 유전자를 포함한 플라스미드(세포에서 염색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DNA조각)를 가져오는데 능숙해서 빠르게 퍼진다고 보고 있다. 일반적인 박테리아는 대사활동이 왕성하면 독성이 떨어지는데 폐렴간균은 그렇지 않다.
우크라이나 병원들은 이미 치료할 수 없는 감염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그의 혈액과 조직에서 6개의 광범위 약제내성(XDR) 균주를 발견했다. 영국 의료진은 2023년 국제 학술지 ‘감염병 발발’에 병원균의 유전체를 해독한 결과 NDM-1 유전자와 23개의 다른 내성 유전자를 갖춘 내성 폐렴간균을 식별했다고 보고 했다. 덴마크 연구진은 9종의 XDR균을 보유한 우크라이나 군인의 사례도 보고했다.
◇우크라이나發 슈퍼박테리아 차단 노력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유럽의 대응 기관은 2022년 3월 유럽 전역의 병원에 우크라이나 환자를 격리하고 내성 병원균에 대한 검사를 하라고 조언했다. 여러 유럽 국가와 멀리 일본까지 우크라이나의 XDR이 확산했다는 결과를 얻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달 유럽연합(EU)의 혁신 연구 프로젝트인 호라이즌 유럽의 지원을 받아 키이우에 항생제 내성 연구 허브를 설립했다. 우크라이나의 연구자들은 여전히 “어떤 저항 유전자가 존재하는지, 전쟁이 유전자 패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포괄적인 관점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보건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다중약물내성균에 감염되는 경로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몰리고 의료 자원이 부족한 지역병원이 가장 의심을 받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해 잘 사는 국가들은 대부분 개인 병실과 전담팀을 투입해 항생제 내성 환자를 돌보지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기초 과학자들도 다제 내성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호출부호 ‘블랙’도 미생물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 분자 생물학 및 유전학 연구소의 미생물학자 올레나 모시네츠 박사는 이 우크라이나 군인의 주치의들에게 아지트로마이신과 메로페넴을 쓰는 복합 요법을 시도할 것을 조언했다. 두 항생제는 내성균의 바이오필름을 파괴하고 강력한 항생제인 카바페넴에 대한 민감성을 높이는 효과를 낸다.
호출부호 ‘블랙’은 실제로 이 복합 효과를 보고 상태가 호전됐다. 투약 이후 간병인들과 농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고 6주후 퇴원했다. 의료진은 지난해 9월 국제학술지 프론티어스인메디신에 이 복합 요법이 박테리아를 연달아 때리는 ‘원투펀치’ 효과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의료진은 이런 복합 요법이 한 명의 환자에 해당하는 사례일 뿐 광범위한 채택을 할 정도로 근거가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고 평가했다.
공중 보건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내성 미생물에 맞서는 세계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우려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보고되는 약물 내성 문제는 항생제 시대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각국이 항생제 남용과 확산 방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10~20년 뒤엔 항생제를 아예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참고 자료
Journal of Infection(2024), DOI: https://doi.org/10.1016/j.jinf.2024.106312
EID Journal(2023), DOI: https://doi.org/10.3201/eid2908.230484
Lancet(2024), DOI: https://doi.org/10.1016/S0140-6736(24)018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