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의 선구자인인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의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한 과학자’로 불린다. 그의 전기를 읽고 미생물학자를 꿈꿨던 학생은 대학 입학 후 32년이 지나 신경계와 면역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신경면역학 분야의 세계적인 의사과학자가 됐다. 바로 허준렬(51) 미국 하버드대 의대 면역학 교수다.
허 교수는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나와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내는 세계적 뇌신경과학자인 글로리아 최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다. 두 사람은 칼텍에서 함께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부부는 각자 전공인 면역학과 신경과학을 융합해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이 뇌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밝히는 데 집중했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와 우울증,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난치성 신경질환 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지난 21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호텔에서 만난 허 교수는 “한국이 보유한 차별화된 데이터 경쟁력을 활용해야 한다”며 “이를 연계한 바이오뱅크(생물자원은행) 활용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세계 바이오 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이날 열린 제12회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포럼(HIF 2024)’ 기조강연 연사로 초청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면역학과 신경과학이 결합한 신경면역학이 난치병 치료의 새 길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면역계는 우리 몸에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병원체가 침입하면 이를 막아낸다. 이때 열이 나거나 염증이 생기기도 한다. 허준렬 교수에 따르면 면역계는 병원체를 물리치는 것뿐 아니라 뇌 기능을 조절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몸이 안 좋을 때 아무리 좋은 미팅이라도 나가기 싫어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지는 것을 예로 들었다.
면역계는 면역반응을 조절하는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을 분비한다. 원래 병원체를 공격한다고 알려졌는데, 뇌에서 사회성을 전담하는 영역의 활성도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허 교수 부부는 최근 2152명 자폐 스펙트럼 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이들 중 17%가 아파서 열이 날 때 자폐 증상이 호전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열이 날 때마다 건강한 아이처럼 말을 하거나 반복행동이 줄어드는 것이다.
허 교수는 “자폐 증상이 나아지는 현상은 열 자체가 아니라 면역계가 활동한 결과 중 하나”라며 “사이토카인의 일종인 인터루킨17(IL17)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쥐에게 인터루킨17를 주입하자, 이러한 자폐 증상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허 교수는 2020년 바이오 기업 인테론을 설립해 신경 면역시스템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중증 자폐 스펙트럼을 앓는 환자의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동안 신경면역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들과 다양한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갖고 있지만 환자 진료가 아닌 새로운 의료 기술, 신약, 첨단 의료 장비를 연구·개발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과학자이고, 세계 상위 제약회사 10곳의 최고기술책임자 중 70%가 의사과학자다.
허 교수는 의학 부문에서 세계 선두 교육기관인 하버드 의대가 서울대병원, 서울대 의대의 의사과학자 양성에 협력하도록 큰 힘을 보탰다. 하버드대를 설득했고, 서울대에 하버드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할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그 결실로 올해부터 서울대의 의사과학자가 하버드 의대에서 수련하는 연수 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허 교수는 “코리안 아메리칸(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 하는 것으로 한국과의 협력을 더 넓혀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 선발된 한국 의사과학자들은 올 9월부터 하버드 의대 연구실에서 연수를 받는다. 그는 “한국 의대 교수와 미국 하버드 의대 교수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의사과학자 양성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지원 프로그램이 더 많이 생겨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 각 분야 에서 리더가 되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고 했다. 연수생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 교수는 “한국 의대생들 중 기초연구를 하겠다는 젊은 연구자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며 “제약·바이오 분야 연구개발(R&D) 경쟁력의 근간인 기초연구를 하는 젊은 연구자 양성을 위한 투자와 지원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한국이 반도체 신화에 이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분야는 바이오”라며 “한국이 좀 더 큰 비전을 갖고, 연구자와 기업들을 지원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의사과학자들이 나중에 제약·바이오 산업에서 활약할 연구 인프라(기반 시설)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국이 세계 제약·바이오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영역으로 빅데이터(대용량 정보)와 바이오뱅크를 제시했다.
바이오뱅크는 암이나 희귀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인체 시료와 유전정보를 모은 데이터베이스를 말한다. 그는 한국이 초대형 바이오뱅크를 구축하고, 활성화한다면 우수한 연구자들과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이 자연스럽게 유입된다고 기대했다.
허 교수는 “한국은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기반의 굉장히 크고 가치 있는 데이터 자원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며 “개인정보를 가린 데이터를 연계한 대규모 바이오뱅크를 구축하고 이를 연구와 기업에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든다면 큰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