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로스앤젤레스 한 병원에서 방사선 전문의가 유방암 환자의 유방 촬영 사진을 확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 2004년 미국 여성 카먼 라이스는 뇌 종양 가운데서도 가장 치명적인 신경교종 진단을 받았다. 뇌와 척수 내의 신경교세포에서 나타난 종양으로 뇌 조직을 파괴하며 수술로 제거하기 어렵다. 의사들은 처음 진단을 받을 당시 그녀에게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신경교종의 5년 생존율은 8%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 국립암연구재단은 지난 6월 그녀의 생존 2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 메시지를 냈다. 또 다른 미국 여성 케이 케이스도 암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다. 1994년 치명률이 높은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췌장암은 5년 생존율이 모든 암 중 가장 낮은 10% 내외로 가장 치명률이 높다. 케이스는 췌장과 십이지장, 위 하부와 소장 일부, 담낭을 잘라내고 소장을 남은 췌장과 담관, 위 상부에 붙여주는 휘플 수술을 받았고 올해로 30년째 건강하게 살고 있다.

한때 이처럼 예상보다 오래 생존하는 악성 암 환자를 두고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암 환자들이 이런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오랫동안 생존하는 과학적인 이유를 찾아 나섰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병원을 비롯해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지원을 받는 8개 영국 내 암 센터들은 17일(현지 시각) 전 세계 40개 병원, 기관들과 협력해 암 치료에서 놀라운 효과를 보고 예상보다 오래 살아남은 ‘슈퍼 생존자들(Super Survivor)’의 생존 비결을 알아내는 연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치명적 암에서 살아 남은 1000명에게서 치료 비결 찾아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에서 장기간 생존한 암 환자 1000명의 생물학 정보를 수집한 다음 유전자(DNA), 혈액 단백질, 미생물, 분자적 바이오마커를 분석해 일부 환자가 어떻게 오래 생존하는지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수집된 정보를 활용해 암의 약점을 이해하고 공격적인 종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설계하는 데 사용될 전망이다. 또 슈퍼 생존자에게서 발견되는 생물학적 특징을 활용해 당장 말기 환자에게 적용 가능한 치료법도 함께 개발한다.

‘로잘린드 연구’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X선을 이용해 DNA와 바이러스, 석탄 구조를 밝혀낸 영국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기려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녀는 난소암으로 숨지기 6년 전인 1952년 X선 사진으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최초로 포착했다. ‘사진 51′로 불리는 사진을 본 1953년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최초로 제안했고 지금과 같은 유전자 시대가 열렸다.

프로젝트엔 40개국의 암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프로젝트의 취지는 분명하다. 암을 잘 이겨낸 사람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생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배울 게 있다면 어떻게 상태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가장 위협적인 3대 악성 종양인 소세포 폐암과 신경교종, 전이성 췌장관 선암 판정을 받은 환자의 정보를 분석한다. 특히 생존 기간이 상위 3%에 해당하는 생존자의 정보가 중점 분석 대상이다. 장기 생존 비결과 관련한 생물학적 요인을 해독하고 지금보다 효과적인 암 치료의 길을 열 통찰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NHS 트러스트의 임상 종양학자 컨설턴트인 탕캄마 아지트쿠마르 교수는 “치명적인 암을 앓는 사람들은 대부분 2~3년 이상 산다고 기대하지 않지만 3~5%는 살아 남는다”며 “암 환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10년 생존율 낮은 암 환자에게 희망

췌장암 진단 이후 30년을 생존해 가장 오래 산 생존자로 꼽히는 케이 케이스. /시나마고위츠재단

아직까지 과학자들은 암 환자 가운데 왜 누구는 오래 살아남았고 누구는 그러지 못한 지 명확한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최근까지 연구를 종합하면 일부 환자는 항암제에 취약한 유전자의 특성으로 생존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면역 체계가 암 세포를 파괴하는 능력이 있는 덕분이라는 결과도 확인됐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환자가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 요인을 알아내고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슈퍼 생존자에게서 수집한 방대한 정보는 프랑스 바이오벤처인 큐어51(Cure51)이 운영하는 대규모 분석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된다. 이 회사는 프랑스 벤처캐피털 회사인 소피노바로부터 투자를 받고 있다. 니컬러스 볼리코 큐어51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치명적인 암에 걸렸는데도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그 이유를 이해하고 생존 메커니즘을 밝혀내면 암의 근원적 치료 방법을 확보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다른 부위로 빠르게 전이되고 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과학자들은 최근 치료하기 어려운 암 중 상당수가 악성 유전 물질인 염색체외DNA(ecDNA)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좀 더 정확한 원인 물질과 유전자를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슈퍼 생존자를 찾아 등록하는 것은 이번 프로젝트 성공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대다수 국가가 건강을 되찾은 암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당장 이번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영국만 해도 5년 이후 암 생존자 추적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이 연구는 10년 이상 생존율이 떨어지는 암 환자에게 희망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국가별로 10년 생존율은 암 종류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갑상선암과 전립선암, 유방암은 생존율이 높지만 담낭과 담도암, 폐암과 췌장암은 생존율이 낮다. 영국 암 연구소의 해티 브룩스 교수는 “같은 암을 앓는 환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를 알아낸다면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 선택권이 별로 없는 난치암 환자에게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