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10명 중 6명이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의 업무를 강요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공의 이탈로 의료 공백 사태가 일어난 가운데, 진료지원(PA) 간호사 업무가 관련 시범 사업을 하지 않는 병원에서도 이뤄지면서 간호사들이 법적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법 진료를 한 셈이 된 간호사들은 전공의 업무를 대신하면서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다.
대한간호협회(간협)는 20일 서울 중구 간협 서울연수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PA 간호사 시범사업 대상 의료기관이면서도 참여하지 않은 병원이 61%에 달해 간호사들이 법적 보호마저 받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월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뒤, 간호사가 합법적으로 의사 업무 일부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간협 조사 결과,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전공의 업무를 간호사에게 부담하는 불법 진료가 일어난 것이다.
간협은 지난 6월 19일부터 7월 8일까지 387개 수련병원을 대상으로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 기관 중 39%인 151개 기관만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PA 간호사는 현재 의료법 상 합법적인 인력이 아니다. 다만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전담 간호사’로 불리며 진료 지원 업무를 도맡았다. 간호사들은 최근 전공의 이탈로 의료 공백이 생기면서 진료 지원 업무에 더 많이 투입되고 있다. 간호사들은 PA 간호사가 여전히 불법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는 만큼, 진료 지원 업무를 하면서 심리적 압박감을 받고 있다.
간협 조사에 참여한 간호사의 62.4%는 병원이 전공의 업무를 일방적으로 강요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37.2%는 시범사업에 대해 ‘사전에 설명을 들었지만 일방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사전에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고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는 응답도 25.2%나 됐다.
특히 간호사들은 “점점 더 일이 넘어오고 있고, 교육하지 않은 일을 시켰다”며 “시범사업 과정에서 30분~1시간 정도만 교육한 후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고 답했다. 또 “수련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는데 업무 범위가 명확하지 않고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며 “업무에 대한 프로그램도 따로 없어 수련의 업무를 간호사가 간호사에게 가르치는 상황”이라고 했다.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의료기관의 PA 간호사는 1만 3502명이다. 시범사업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간호사들에게 PA 업무를 시키는 병원까지 합하면 PA 간호사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료공백으로 병원 경영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신규 간호사 발령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 47개 상급종합병원 중 조사에 참여한 41곳은 작년 신규 간호사를 8390명 선발해 올해 발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13일까지 이들 중 76%(6376명)를 아직 발령하지 못했다.
탁영란 간협 회장은 “이번 실태조사 결과 국민의 생명과 환자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의료현장을 지키는 간호사를 보호할 수 있는 법 체계가 너무 허술하고 미흡하다는 점이 드러났다”며 “정부 시범사업 지침은 ‘근로기준법 준수’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의사 집단행동이 장기화하면서 간호사의 근무 환경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